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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에서 잉태된 문화를 발판으로 미래의 광장을 설계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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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호 07면

취미는 삶의 활력소이자 우리를 이 비루한 세계에서 번쩍 들어올려 천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하지만 취미의 밝은 면에 가려져 있는, 취미의 어두운 면도 분명 있다. 이중생활이라고 하면 흔히 유부남이 아내 몰래 정부와 놀아나는 것을 가리키기 십상이지만, 취미야말로 그런 이중생활을 우습고도 가엾게 여긴다.

장정일이 만난 작가 - 오디오 애호가·건축가 김영섭

왜냐하면 취미란 배우자에게 발각될까봐 조바심 치며 조심하는, 체면조차 차리지 않는, 공공연한 이중생활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오디오가 놓인 안방 문에 ‘Music is my life, Music is my wife’라고 써놓은 대담한 음악광을! 그런데도 등산·낚시·골프를 비롯한 취미라는 이름의 공공연한 이중생활은 여자를 숨겨둔 게 아니라는 점 때문에 용서되곤 한다.

오디오가 차지하고 있는 안방 문에다 저렇게 뻔뻔스러운 글을 적은, 그 대담한 불륜남이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다. 그 문구를 보고서도 아무 내색하지 않던 아내가 드러내놓고 싫어하는 게 있으니, 바로 ‘오디오쟁이’들을 만나는 일이다. 빵빵한 오디오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지인의 집에 갔다 오면, 한 몇 달 동안 ‘바람이 들어’ 멀쩡한 오디오를 바꾸겠다고 설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늘은 인터뷰를 빙자해 김영섭 선생 댁에 당당히 다녀왔다. 선생은 이번에 자신의 40년 넘는 오디오 편력과 오디오의 역사를 총결산한 『오디오의 유산』(한길사, 2008)을 펴냈다.

“얼핏 생각하기에 오디오 문화는 광장에 있는 것을 내실로 가지고 가 문을 걸어 잠그는 것처럼 보여져 여타의 문화가 갖는 개방적 이미지보다 폐쇄성이 강한 장르처럼 인식돼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른 문화와 마찬가지로 ‘밀실’이란 문화가 잉태되는 자궁과도 같은 곳이므로 내실은 광장에서 상상하거나 생각할 수도 없는 것들의 실험과 기행(奇行)이 가능한 곳이기도 합니다.

오디오 문화가 사회에 줄 수 있는 순기능은 천상의 비밀을 가리고 있는 두툼한 장막 끝 한 자락을 살짝 들어올려 그 사이로 들려온 천국의 소리에 대한 기억들을 불씨처럼 간직했다가, 죽어 있는 집단의 청각에 생명의 소리(Vitavox)를 불어넣는 일입니다. 거창하게 표현하면, 마치 성배를 지키는 일을 하는 밀교의 제사장과도 같은 일입니다.”

6·25가 발발했던 해인 1950년에 태어난 김영섭 선생이 오디오파일(오디오 애호가)이 된 것은 상처와 관련된다. 어린 시절 겪은 한국전쟁의 참혹한 기억들이 선생의 무의식 속에 들어와 음악이든 오디오든 그 무엇인가로 그것을 치유해야만 했다. 곤궁하고 절망적이었던 68년 이른 봄, 첫 대학 입시에 실패한 열여덟 살의 소년은 대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집 앞을 지나는 아름다운 수녀를 보고 정릉의 한 수도원 언덕까지 뒤따라 올라갔다.

그때 소년은 사제관 거실에서 울리는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d단조(BWV565)를 듣게 되고, 신부님의 JBL 스피커와 매킨토시 앰프를 조우하게 된다. 음악과 신앙의 동시적 만남을 “운명적 만남”이라고 표현하는 저자는 신학교로 눈길을 돌리기도 했으나, 대학은 건축공학과를 선택했고, 현재는 세계 유수의 건축가 인명사전에 등재될 만큼 성공한 건축가다.

“중세인은 우주가 음악의 조화(Musica Mundana) 속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2세기 프랑스의 생 드니(St. Deny) 수도원의 대원장 쉬제르(Abbot Suger)는 음악의 원리와 화성의 비례로 지어지는 성당 건축을 꿈꾸었고, 생 드니 수도원 대성당 건립 시 실제 그것을 시도했습니다. 반면 바흐의 푸가 기법(art of Fuga)은 대단히 건축적 방법론을 가지고 만든 음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커다란 질서와 반복되는 움직임 사이의 변화를 통해 음악이라는 계시 속에 감춰져 있는 우주의 비의를 풀어보려는 시도가 푸가의 기법이죠. 차원이 다른 얘깁니다만, 음악은 교회 공간에서 건축과 더불어 발전된 역사가 있습니다. 음악의 다양한 장르와 형식 또한 건축 공간에서의 다양한 연주를 상정했던 당시 음악가들의 영민한 대응으로 새로 탄생하거나 발전돼 왔습니다.”

김영섭 선생은 유수의 건축가 인명사전에 자신이 등재된 이유가, 사람들이 잘 하지 않는 성당 건축을 주로 했기 때문이라고 농담을 한다. 실제로 교회 건축으로 이름난 선생은 설계 시에 음향 부분을 직접 감수하기도 하는데, 아름다운 음향으로 이름난 서울의 명동대성당 파이프오르간과 성가대를 위한 상층부 설계 변경을 직접 도맡은 바 있다.

우리나라의 오디오 문화는 광장 문화이기보다 사교집단과 같이 내밀한 오디오파일이 많이 형성돼 있는 게 특징이다. 따라서 정설보다 야사가 많이 등장한다. 『오디오의 유산』은 약 2만 명으로 추산되는 오디오파일을 위해 쓰였다. 가격이 8만원이나 하는 이 호화로운 책은, 오디오파일이라면 침을 꿀떡 넘길 귀한 사진 자료가 충실히 담겨 있는 데다 빈티지 명기에 대한 저간의 부정확한 역사와 용어를 바로잡았다.

“나는 오래전부터 아날로그(비닐 레코드) 전도사였던 데다 케케묵은 옛 기계를 이용해 음의 최고 경지를 찾고자 했습니다. 마음을 흔들고 감동시키는 연주가 모두 아날로그 시대에 있었고, 인간의 청각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1950년대 무렵의 오디오 기기들이 이미 기계로서는 완성 상태에 돌입해 있었기 때문이죠. 현대는 디지털 소스(CD)가 대세를 이루고 있지만, 인류 역사와 문화가 후퇴와 전진을 반복하면서 점진적으로 심화됐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어느 날인가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형태로 아날로그가 다시 부활할 것을 굳게 믿습니다.”

앞서 취미는 공공연한 이중생활이라고 트집 잡았지만, 김영섭 선생은 아주 일찍부터 오디오를 가족들에게 개방했다. 대개의 오디오파일들이 애지중지하는 오디오나 음반에 일절 접근을 금지하는 괴벽과는 담을 쌓았던 결과, 취미가 가족 간의 대화 단절을 부르는 삭막한 풍경이 아니라 온 가족이 음악으로 하나 되는 행복을 누리게 됐다.


`장 작가`란 줄임말로 불리는 장정일씨는 시인·소설가·희곡작가·책 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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