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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칼럼>관철동시대 55.棋界 주변 사람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0면

비정한 승부세계에「꿈꾸는 승자」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관철동의 아웃사이더들에겐 이것이 재미있는 화두였다.
5.16후 절필하고 단양의 농부가 된 시인이자 기자였던 신동문(辛東門)선생.한국기원 3층 일반회원실에 나와 온종일 바둑구경을 하다가 밤이 깊어지면 조용히 자취방으로 사라지던 철학자 민병산(閔丙山)선생(사람들은 그를 관철동의 디오게 네스라 불렀다). 찢어지게 가난했으나 흐흐 웃으며 손해는 도맡아보고 다니던 소설가 강홍규(康弘圭)씨.심성이 가을하늘처럼 투명한『만다라』의 작가 김성동(金聖東)씨.그리고 또 바둑을 안다는 이유로 관철동을 오가며 꿈꾸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종종 바둑이란 창을 통해 세상을 보고싶어했다.그들의 술자리엔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큰 세상의 얘기가 있었고 조남철.김인.조훈현으로 이어지는 작은 세상의 얘기가 있었다. 큰 세상쪽에서 꿈꾸는 사람들은 여전히 백전백패.그렇다면바둑계라 불리는 작은 세상쪽은 어떻게 되느냐.
60년대 이전부터 바둑계를 지켜봐온 관철동 사람들은 이런 얘기가 나오면 으레 담백하지만 고집센 김인 9단을 떠올리곤 했다. 金9단은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섞이기를 거부한 독특한 사람이었으나 10년간 바둑계의 승자였다.그는 시대의 총아라 할 「아파트」를 외면했고 『보증서지 말라』는 시대의 충고에 귀를 막았다. 어느날은 관철동사람들과 소주약속을 한뒤(해가 떨어지면으레 하는 약속이었다)청와대 경호실의 높은 사람이 저녁초대를 하자 선약이 있다며 정중히 거절하기도 했다.
바둑꾼으로서의 긍지가 강했으나 그걸 드러내지 않았다.바둑을 둘 때도 그는 새로운 유행을 체질적으로 피했다.
그러니 金9단은 꿈꾸는 승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그러나 곰곰생각하니 金9단은 자신의 세계를 고집하면서부터 조훈현에게 패배하기 시작했다.『재기할 것이다』고 끝까지 기다렸으나 金9단은 승자의 대열로 돌아오지 못했다.
대신 조훈현-서봉수의 강인한 승부가 끝없이 이어졌다.관철동사람들에게 이들의 승부는 각박하고 비정해 보였다.
저쪽 큰 세상의 승부보다 공정한 건 사실이었으나 때로는 털끝의 오차도 없는 기계처럼 숨이 막혔다.사실은 이것이 승부의 현실이고 법칙이었다.
『이기려면 역시 꿈을 꿔서는 안되나봐.』 뭔가 더 남길 것같았던 신동문선생.민병산선생.강홍규씨등이 차례로 세상을 떠난뒤 관철동사람들은 주눅이 들어 민망한 얼굴로 중얼거리곤 했다.
그래도 이창호.유창혁의 출현은 눈을 번쩍 뜨게하는 구석이 있었다. 맨처음 우량아 이창호가 얼음과자를 입에 물고 느릿한 팔자걸음으로 관철동을 걸어왔을 때 생전의 閔선생은 『대우(大愚)의 풍모가 있다』며 미소를 지었다.
유창혁은 「공격」이라는 파격의 무기를 가지고 관철동을 감동시켰다.「여름햇살같은 바둑」「질적으로는 세계최고」라는 찬사가 쏟아졌다.바둑의 본질은 「실리」에 있건만 그들은 그 사실을 절대인정하지 않았다.
유창혁이 88년 曺9단의 대마를 잡고 타이틀을 따냈을 때는 『만방이다』며 흥분했다.만방이라니,반집을 다투는 뼈를 깎는 승부세계에서 철없이 만방이라니.
그런 점에서 신산(神算)이창호의 신속한 부상은 깨소금같은 즐거움에 찬물을 끼얹는 작용을 했다.이창호에 대한 많은 장외토론이 벌어졌다.
『바둑이 그런 게 아니잖아』하고 사람들은 말했다.『어린애가 대가라면 바둑이 이상하잖아.』 아득히 오천년의 도를 간직해온 바둑.그 세계에서만이라도 어떤 유구하고 빛나는 것들이,예를 들자면 이상(理想)이나 철학의 냄새가 나는 것들이 현실론을 압도해주기를 바랐는데 철없는 10대소년이 1인자가 돼버리면 이를 어쩌란 말인가.
한국기원은 3층이 일반실이고 4층이 기사실이었다.한층을 사이에 두고 그들은 이렇게 전혀 딴 얘기를 하며 살았다.
이젠 홍익동 한국기원이나 근처의 어디를 가도 이런 분위기는 찾을 수 없다.젊은 프로들은 조훈현.서봉수는 상대가 되지않을 정도로 강인하고 끈질겨졌다.
辛선생이나 閔선생은 군사정부하에서,그 불공정게임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기에 꿈꾸는 사람도 한번쯤 승자가 돼주기를 그렇게 갈망했었는지도 모른다.혹은 아닐지도 모른다.
꿈꾸는 승자란 어쩌면 영원한 화두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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