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에 갇힌 아이들] 2. "공부해라 야단치는 사람도 없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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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길음동 달동네에서 만난 두 아이. 학교를 그만둔 지 벌써 4년째. 그렇다고 기술을 배우거나 일을 나가는 것도 아니다. 하루하루를 그냥 보낸다. 이들은 집보다 PC방을 더 좋아한다.

#1 부모 무관심 → 의욕 상실 → 학업 중단

서울 성북구 길음동의 성수(16)는 매일 정오 무렵에야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혼자서 대충 끼니를 때우고 찾아가는 곳은 버려진 동네의 누추한 골목 안 PC방. 친구 서넛은 이미 출입문을 등지고 앉아 인터넷 게임에 빠져 있다.

성수는 중1 때인 3년여 전부터 학교와는 담을 쌓고 말았다. 딱히 이렇다할 까닭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어렴풋이나마 학교에 대한 열정이나 재미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두 번 저지른 지각에 길들여졌고, 길들여진 지각은 그보다 더 많은 결석으로 이어졌으므로 어느 날 자퇴를 해야 될 것 같았다.

술에 절어 한달에 두세 번 뒤뚱뒤뚱 집을 찾아오는 아버지나, 따로 살고 있는 엄마 역시 그 위험한 도피를 눈꼴사납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애써 만류하지 않았다.

학교에 가지 않는다 해도 그에게 하루는 노루 꼬리처럼 짧기만 하다. 날마다 모이는 친구 다섯도 모두 중학교를 일찌감치 자퇴해서 냉소적이고 풀 죽은 아이들이다.

한 친구는 몇 달 동안 PC방에 웅크리고 앉아 컴퓨터 게임에만 몰두하고, 나머지는 용돈이 떨어지면 띄엄띄엄 일을 나간다. 끽해야 배달원이거나 주차요원이 그들 차지다. 하지만 이것도 반딧불처럼 잠시 반짝할 뿐 그들의 삶에 역동성을 심어주지 못한다.

이들에게 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동네 형(22)이 그들에겐 선망의 대상이다. 그 역시 중학교를 중퇴한 상처를 가졌지만, 지금은 포장마차를 차려 수입이 짭짤한 청년이다.

그 형은 술집 웨이터.호스트바 종업원같이 밑바닥을 훑으며 맵고 짜고 알뜰하게 식물채집하듯 돈을 모아왔다. 성수 '6인조'에겐 돈을 모아온 경위나 수단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최근 빈곤층 출신으로 학업을 중단한 13~18세 청소년에게 학업중단 이유를 묻는 조사를 했다.

이에 '집안 생계 때문'이라고 답한 것은 전체의 20.8%에 그쳤다. 나머지는 '가정에 대한 불만'(32.7%), '공부가 싫어서'(23.9%), '학교가 싫어서'(22.6%) 순이었다. 가족에 대한 불만과 학습의욕 상실이 지금의 성수 '6인조'를 만들어준 것이다.

#2 아동 방치 → 지능 저하 → 학습 곤란

지난 2월 서울시립동부아동상담소에 재입소한 정훈(13)이의 지능지수(IQ)는 80으로 측정됐다. 4년 전 이곳에 처음 입소했을 때는 IQ가 115였다. 집으로 돌아간 뒤 머리가 더 나빠진 것이다. "부모가 먹고사는 것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아이들의 학업이나 생활태도 등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이렇게 방치되다 보니 아이들의 지능도 떨어지고 무기력해지는 거지요." 이 상담소 박미정 과장의 진단이다. 그래서인지 상담소에 들어오는 아이들의 IQ검사를 해보면 10명 중 6명 정도는 80 수준에 그치고 있다.

올해 1월 안양소년원에 들어온 정연(17.여)이의 IQ 역시 80을 조금 넘는다. 수리개념 등 모든 면에서 또래들과 비교해 훨씬 처진다. 하지만 정연이 생각은 다르다. "공부하라고 야단치는 사람이 주위에 없었어요. 그렇다고 못한 것도 아니에요." 중학교를 중퇴한 그의 기억에는 초등학교 기억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연히 알게 된 그 당시 지능지수는 110을 훨씬 넘었다고 한다.

그의 심리상담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낙관적이고 게으르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행위를 모방하는 성격이 강하다." 정연이는 어릴 적부터 막노동을 하며 전국을 돌아다녔던 아버지의 사랑이 늘 그립다. 어머니는 정연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정신병을 앓아 착실한 부모 구실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가슴 속에는 언제나 수치심만 가득할 뿐 삶에 중력을 두고 아득바득 살아가려는 목마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가출해버렸다. 하지만 몸 전체로 확산되는 배고픔만 기다리고 있었던 정연이가 친구와 함께 당장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남의 집 담을 넘는 것이었다. 그 끝에는 소년원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3 부친 실직 → 책상 없는 방 → 성적 저하

곰팡이가 시커멓게 슨 벽지, 벽에 난삽하게 걸린 남루한 옷가지, 세 사람이 옥죄어야 겨우 누울 수 있는 2평 남짓한 옹색한 공간…. 휠 대로 휜 삶의 질곡이 써늘하게 드러난 그 생활공간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유현(12.초등 6학년)이를 맞이하는 집, 서울 봉천동 S여인숙 단칸방의 살풍경이다. 소년은 이곳에서 고물을 주워 파는 아빠,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소년에게는 공부방은커녕 책상도 의자도 없다. 그래서일까, 오후 5시 학교에서 진작 돌아왔어야 할 시간이지만 소년의 행방은 묘연하다. 소년의 엄마는 "집이 이러니 애가 안 들어오지. 그래도 학교라도 다녀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얼마 전까지 학교를 빼먹고 동네의 '나쁜'애들과 어울려 다녔다고 한다. "공부할 곳도 없는데 일찍 들어와서 뭐해"하며 볼멘소리를 하는 소년에게 엄마가 다독거려줄 말은 없다. 여인숙에 들어오기 전 유현이 가족은 노숙자 쉼터에 있었다. 아버지의 실직으로 임시시설을 찾아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소년은 공부를 곧잘 했다. 하지만 술을 입에서 떼지 못하는 아빠의 공격적인 언사가 이웃을 괴롭혀 그나마 쉼터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무척 똑똑한 아이였습니다. 학습지를 풀면 틀려도 하나 정도였지요. 그런데 이곳을 나가고 난 뒤 밖으로만 돌더니 지금은 성적은 물론 성격마저 모가 난 것 같아요." 유현이네 가족이 머물렀던 노숙자 쉼터 관계자는 "가끔 찾아가 만날 때마다 점점 태도가 나빠지는 것 같아 걱정"이라며 "이런 식으로 가다간 초등학교 졸업장만 가지고 사회에 나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동보호시설에서 가르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4 가정 해체 → 공장으로 → 뒤늦은 학업

상상하기 어렵지만 희귀한 일도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세상의 억압에 시달려 소주를 입에 댔던 아이가 있다. 지금도 아동상담소에서 생활하고 있는 최수영(18)군이 바로 그 당사자다. 열일곱살이었던 지난해에야 가까스로 초등학교 과정을 마쳤던 崔군, 그의 아버지는 그가 네살 되던 해에 알코올 중독으로 초라한 삶을 마감해버렸다. 생활고의 어두운 잔상들을 이겨내지 못한 어머니 또한 초등학교 1학년 때 세상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

유일한 피붙이였던 누나 역시 그로부터 2년 뒤 공장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귀갓길에 교통사고로 숨졌다. 혈혈단신이 된 崔군의 나이는 불과 열살, 그로부터 고결한 삶을 예견할 수 있는 학교와는 등지고 살 수밖에 없었다. "공장에서 실이나 뽑으면서 술 마시고…그러면서 혼자 살았어요." 의무교육인 초등학교조차 외면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에게 나라와 이웃들은 매몰찰 만큼 무관심했다.

지난해 초 이곳 상담소에 보호수용되면서 중입(中入) 검정시험을 치를 수 있겠다는 여유를 찾았다. 崔군은 앞으로 몇 년 뒤 정녕 밀도있는 교육이 예약된 어엿한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까.

특별취재팀=이규연.김기찬.김정하.손민호.백일현.이경용 기자
사진=안성식.박종근 기자

◇알림=18세 이하는 아이들에게 상처를 줄 우려가 있어 가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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