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 공연 '눈높이' 맞추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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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 17기 주부통신원 조화정씨가 시아버지와 함께 53개월, 34개월 된 남매에게 보여줄 연극표를 사고 있다. [강정현 기자]

연극.뮤지컬.음악회 등 유아 대상 공연이 줄을 잇고 있다. 현재 서울지역에서 진행되는 어린이 연극만도 줄잡아 20여편. 하지만 이 같은 공연들이 관람 대상 어린이의 연령을 맘대로 낮춰 정하는 바람에 아이들은 공연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스트레스만 받고 있다. 더 많은 관람객을 유인하기 위한 상술과 부모들의 극성 사이에서 기저귀도 떼지 못한 어린이들이 시달리고 있는 것. 전문가들은 "교육효과도 없을 뿐더러 정서 함양에도 나쁘다"고 지적하고 있다.

◇"너무 어려워요"=지난 19일 본지 주부통신원 조화정(30.서울 구로본동)씨는 53개월, 34개월인 두 아이와 함께 만 두살이면 입장이 가능하다는 S극단의 어린이 연극을 관람했다.

공연장에는 돌 전후의 젖먹이 아이들도 눈에 띄었다. 연극은 친구와의 따뜻한 우정을 강조한 작품. 노래와 율동으로 시작한 도입부분에선 두 아이 모두 신이 났다.

하지만 20여분이 지나니 세 돌이 채 되지 않은 승헌이는 "화장실에 가고 싶다" "내 자동차 어디 있나"하며 시선을 딴 데로 돌리기 시작했다. 몇몇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리거나 소리를 질러 결국 밖으로 나갔다. 잠이 든 아이도 있었다.

조씨는 "아직 '친구'라는 개념이 없는 승헌이에게 '우정'이라는 주제는 너무 어려웠던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대학로에서는 36개월 이상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어린이 과학 뮤지컬이 열리고 있다.

에너지 고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구를 찾아온 외계인들이 깨끗하고 안전한 원자력 에너지를 발견한다는 내용이다.

정전기.전기 등에 관한 기초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극단 관계자도 "만 5세 이상은 돼야 이해가 가능하다"고 인정하고 있다.

◇연령 제한은 기획자 맘대로=어린이 공연물의 연령제한은 극단.극장 등의 판단에 따라 정해진다. 1999년 공연법이 개정되면서 창작 활성화 차원에서 대본 심의 등의 절차를 없앴기 때문이다.

영화만 영상물등급위원회가 관람연령을 결정하고 있다. 대부분의 작품은 수준과 상관없이 '24개월 이상''36개월 이상'이 많다. 공연사가 수익을 높이기 위해 가능한 한 관람 연령을 낮추기 때문이다.

한 공연 관계자는 "유치원 등에 다니기 전의 아이들이 여유시간이 많아 이들을 대상으로 해야 보다 많은 관객을 유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무리한 연령제한이 용인되는 데는 부모들의 극성도 한몫 한다.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문화체험을 시켜주겠다는 과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난 2월 '방귀대장 뿡뿡이의 초록별 대모험'을 공연했던 EBS 사업국은 '만 3세 이상'인 관람연령을 '만 1세 이상'으로 조정했다가 다시'3세'로 환원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예매 과정에서 "우리 아이는 충분히 볼 수 있다"며 하향조정을 요구하는 부모들 때문에 관람연령을 낮췄던 것. 하지만 "아직 혼자 앉아 있기도 어려운 한두살배기에게 표를 팔 경우 지나친 상술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EBS 내부의 판단에 따라 다시 만 3세로 조정했다.

EBS 사업국 조종윤 과장은 "세 살도 안된 아이들을 데리고 와 입장시켜 달라며 진행요원과 승강이를 벌이는 부모들도 많았다"고 밝혔다.

◇"비교육적인 처사"=어린 유아들의 성급한 공연관람에 대해 전문가들은 "역효과만 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연세대 소아정신과 신의진 교수는 "만 3세 정도의 유아들은 추상적 사고가 불가능하고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직접경험을 하지 않고 공연 관람을 통해 교육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한 공간에 몰아넣는 것 자체가 정서함양에 악영향을 끼치는 비교육적인 처사"라고 신교수는 못박았다.

'공연이랑 놀자'(중앙M&B)의 저자인 배은율씨도 "공연장에서 우는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 과자나 사탕 등을 먹이는 부모들도 있다"며 "집중력이 부족한 어린 나이에 공연장을 찾기 시작하면 남을 배려하지 않는 나쁜 관람습관이 굳어질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박진재 푸르니서초어린이집 원장은 "최대 집중시간이 만2세 어린이는 10~15분, 만3세는 30~40분인 것을 고려해 공연물을 골라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기획사 측의 홍보 내용보다는 먼저 공연을 관람한 부모들의 의견을 참고해 고르는 것도 한 방법. 부모들의 관람 후기는 쑥쑥(www.suksuk.co.kr) 등 인터넷 육아 사이트나 해당 기획사 홈페이지 게시판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지영 기자<jylee@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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