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피치] 149. 승엽, 기다림을 배워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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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라."

오사다하루(왕정치). 일본 야구의 살아있는 전설이 그렇게 말했다. 지난해 9월 이승엽이 아시아의 홈런왕을 향해 신명나게 달려가고 있을 때였다. 기록에 도전하는 이승엽에게 타격의 달인, 홈런의 제왕으로서 해주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물었을 때 그는 '기다림의 미학'을 넌지시 제시했다.

오사다하루가 말한 '기다림'은 어떤 의미일까. 몇 가지로 연결시킬 수 있다.

첫째는 타석. 치지 말고 기다리라는 '웨이팅'의 의미가 아니다. 유인구에 속지 말고, 대들지 말고 자신이 기다리는 공이 올 때까지 '버티라'는 뜻이다. 이승엽 같은 홈런 타자에게 "자, 칠테면 쳐봐라"며 정직한 승부를 펼치는 투수는 거의 없다. 이승엽은 "일본 투수들은 불리한 카운트에서도 유인구로 승부를 건다"고 고개를 젓고 있다. 그 유인구에 이제까지 속았다는 자평이다. 시범경기 13경기에 출전해 22일 현재 42타수 9안타, 타율 0.214에 홈런은 두 개로 부진한 이유다.

둘째는 타격. 강타자들이 금언으로 여기는 말 가운데 "투수에게 달려들지 말고 투수가 다가오게 하라"는 말이 있다. 복싱에서 상대를 쫓아가 휘두르는 주먹보다 상대가 들어올 때 받아치는 카운터블로가 치명타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타격의 기술적인 부분과 연결시키면 투수 쪽으로 상체가 쏠려서는 좋은 타구가 나올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이승엽은 서두르고, 초조할 때 투수 쪽을 향한 오른쪽 어깨가 일찍 열리는 나쁜 습관이 있다. 지난해 56호 홈런을 만들어 나갈 때도 신기록에 접근하자 이런 경향이 나타났다. 그가 절정의 타격을 할 때는 몸의 중심을 뒤에 남겨놓고 최대한 기다린다. 그 감각을 잊지 말고 유지하라는 의미다.

셋째, 기다림은 문화다. 야구장 안에서는 물론 밖에서도 일본 특유의 '기다리는 문화'에 익숙해지라는 의미다. 일본인들의 눈에 띄는 성향 가운데 하나가 상대에게 자신의 감정을 먼저 내보이지 않는 것이다. 야구에서 성공하려면 문화에 적응해야 한다. 그래서 기다리는 데 익숙해지고, 감정 표현도 최대한 자제하는 게 바람직하다. 요란한 일본 언론을 견뎌내기 위해서도 여유를 갖고 느긋해져야 한다.

이승엽보다 먼저 일본에 진출했던 이종범은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자신의 모자에 세개의 참을 인(忍)자를 써놓고 야구를 했다. "참을 인자 세번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했던 것처럼 참고, 참고, 또 참기 위해서였다. 이종범도 타석에서 참고, 타격에서 참고, 야구장 안팎에서 참으려고 애썼다. 그의 참을 인자 세개는 왕정치가 말한 '기다림의 미학'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승엽에게 기다림을 강조하는 만큼 또 한번의 기다림을 당부하고 싶은 대상이 있다. 팬들이다. 한 타석에서, 한 경기에서, 며칠 동안 이승엽이 부진하다고 호떡집에 불난 듯 부진을 성토하지 말고 여유를 갖고 기다려 주라는 것이다. 박찬호가 마이너리그 시절, 그의 사부 버트 후튼은 메이저리그에 올라가고 싶어 초조해 하는 박찬호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는 데도 일주일이 걸렸다"고 했다지 않은가.

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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