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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중국의 빗나간 애국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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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서울에서 있었던 베이징(北京) 올림픽 성화 봉송이 폭력사태로 얼룩지면서 중국인들의 빗나간 애국적 민족주의 광풍이 국제사회를 다시 실망시키고 있다. 더불어 올림픽을 계기로 국격(國格)을 높이고 ‘문화 중국’의 이미지를 전 세계에 각인시켜 명실상부한 세계 국가로 발돋움하려던 중국의 야심찬 노력도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중국의 민족주의는 애국주의다.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인 중국은 ‘중국’이라는 국가 이미지와 ‘중화’라는 가상의 민족 이미지로 내부 통합을 추진한다. 특히 개혁·개방 이후 약화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나 도덕 의식을 정치적 민족주의로 대체했고, 경제 발전을 위한 안전판으로써 군사적인 확장주의를 추구한다. 그러면서 ‘위대한 중화’ 건설이라는 애국주의 성향을 확산시키는 중이다.

사실 중국이 애국적 민족주의를 강화해 내적인 결속력을 다지는 것은 중국 자체의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주변 국가, 특히 그와 인접한 우리나라에 미치는 영향은 남다르다.

전 국민이 힘을 합쳐 88 올림픽을 치러낸 우리는 중국인들의 올림픽에 대한 열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자신들의 주장대로 서방의 견제를 뚫고 절치부심하면서 유치한 올림픽이 티베트 문제에 대한 서방의 왜곡된 보도로 잘못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동북공정 등을 통해 중국적 민족주의와의 갈등을 경험하고 있는 한국인들은 오성홍기를 앞세우고 마치 점령군처럼 서울시청 광장에 운집한 중국인들을 보고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또 중국의 힘을 과시하는 맹목적 애국주의가 폭력이라는 해결 방식을 택한 데 놀랐으며, 수도 서울에서 벌어졌다는 점에서 민족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물론 우리도 안이하게 대처한 면이 있다. 지구촌을 도는 올림픽 성화 봉송은 3월에 발생한 티베트 사태에 대한 서방 언론의 비판이 고조되고, 각국 주요 인사들의 올림픽 개막식 참석 거부 움직임이 확산되는 가운데 서울에 왔다. 즉 중국 정부의 위기의식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고, 해외 성화 봉송이 서울을 거쳐 북한·베트남을 끝으로 중국 내부로 이어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서울 성화 봉송은 마지막 마무리였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대한민국이 평화적인 집회와 시위가 보장된 민주주의 국가이며, 동일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 이를 고려해 양국 정부 당국자가 서로 긴밀한 의견 교환을 했더라면 폭력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사건을 대하는 중국 정부의 인식에 있다. 중국이 사실상의 사과를 했다고는 하지만 외교부 대변인은 이번 사건의 본질이 티베트 독립주의자로부터 성화를 지키려는 중국 유학생들의 정의로운 행동이었다며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즉 자신들의 기준으로 잘못된 일이라고 판단되면 그에 대해서는 장소에 관계없이 폭력을 써도 무방하다는 전체주의적 인식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이는 서방에 대한 피해의식에 바탕을 둔 중국식 해결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중국은 대국의 풍모를 잃었다. 오히려 정중하게 한국에 사과함으로써 그동안 티베트 문제와 관련해 부정적으로 확산됐던 자신의 이미지를 씻어버릴 기회를 놓쳤다. 또 한국인들에게 이해를 구할 기회도 잃는 우를 범했다. 중국이 느끼고 있는 서방 세계의 중국 견제 내용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번 사건을 두고 보인 중국의 태도는 적어도 ‘책임 있는 대국’의 모습은 아니다. 올림픽만 잘 치르면 된다는 편협한 생각에서 벗어나 개방과 자유라는 올림픽 정신에 충실한 ‘열린 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한·중 관계가 이 일로 인해 소모적 민족주의 논쟁으로 흐르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점이다. 폭력시위 주동자에 대한 엄단과 중국 정부에 대한 강력한 항의는 당연한 것이지만, 이러한 대응이 과도하고 맹목적인 반중 정서로 연결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우리는 문화 민족이다.

강준영 한국외대 국제지역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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