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고

수준별 수업이 공교육 정상화의 핵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최근 정부가 발표한 학교 자율화 3단계 조치에 따라 교육계에서 낯익은 메뉴인 ‘우열반’과 ‘수준별 수업’이 다시금 논란거리다. 학습자의 눈높이에 부합되는 교육 내용과 방법을 제공함으로써 교육의 적합성과 수월성을 추구하는 수준별 수업의 취지에 대해서는 대개 공감한다. 그러나 학교의 여건과 상황, 학생들의 정서적인 문제와 불평등의 재생산 문제 등은 일부 교육 관련 단체에 수준별 수업의 반대 논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필자는 지난 겨울 서울시에서 주관하는 과학교실에서 수학을 가르치며 수준별 수업의 필요성을 다시금 절감하게 되었다. 서울의 각 중학교에서 선발된 우수 학생들임에도 불구하고 수준 차이가 너무 커서 수업을 진행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필자의 설명이 마치 외계인의 말이나 되는 양 절망의 눈빛을 보내는 학생부터, 저렇게 시시한 내용을 굳이 시간 낭비하며 들어야 하는가 하는 시큰둥한 눈빛의 학생들까지, 그 양 극단을 동시에 바라보는 것은 일종의 고통이었다.

학생의 학습 동기를 유발시키기 위해서는 학습자의 인지 상태와 어느 정도 관련을 가지면서 동시에 적절한 불일치와 갈등 요소를 지닌 교육 내용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적정 수준의 불균형’은 일률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제식 수업보다는 수준이 비슷한 학생들로 집단을 편성한 수준별 수업을 통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미국에서 연구년을 지내면서 아이를 현지 중학교에 보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적어도 수학과 영어에 있어서는 수준별 수업이 선진국들의 대세임을 알 수 있었다. 미국에는 차별화된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는 사립학교들이 적지 않지만 다수를 이루는 것은 공립학교다. 대부분의 공립학교가 학생 선발권을 갖지 않기 때문에 학생들의 수준 차이가 크다는 점에서 우리와 여건은 비슷하다.

미국의 거의 모든 중등학교에서는 수학과 영어 수업을 수준별로 진행한다. 내 아이가 다니던 중학교의 경우 학생들은 진단검사를 거쳐 예비대수, 대수, 기하 중 한 과목 수업에 배치된다. 예비대수와 대수 과목은 각각 일반반과 우수반(Honors)으로 구분되며, 예비대수 일반반의 경우는 또다시 수준에 따라 분반된다. 동일 학년이라도 상이한 수학 과목을 배우며, 한 과목 내에서도 반을 분화시켜 학생들의 수준 차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평가는 반별로 이루어지므로 우수반에 속한 학생들이 상대적으로 불리하지만 등급을 위해 하향해 반을 옮기는 경우는 없고, 학생과 부모가 원하면 상향해 반을 옮길 수 있는 식으로 융통성 있게 운영된다.

학생들에게 제공되는 교육 내용과 방법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기준으로 할 때 한 쪽 끝에는 일제식 교육이, 다른 끝에서는 개별화 교육이 위치한다. 도제식이나 서당식 교육과 같이 개인별로 맞춤 교육을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학교라는 공교육 하에서는 불가능하다.

집단 내의 동질성을 확보하는 방법으로는 ‘학교 간’ ‘학급 간’ ‘학급 내’ 수준별 교육이 있다. ‘학교 간’ 수준별 교육은 자체적인 학생 선발을 통해 학교별로 동질의 학급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고등학교를 김나지움, 레알슐레, 하우프트슐레로 구분한 독일이 대표적인 예가 된다. ‘학급 간’ 수준별 교육에는 전 과목 총점에 따라 반을 편성하고 모든 과목의 수업에 적용하는 우열반이 있고, 일부 과목에 대해서만 수준별 이동수업을 하는 방식이다. ‘학급 내’ 수준별 교육은 학급 내에서 수준으로 분단이나 조를 편성하는 방식이다.

학교 간 수준별 교육은 3불정책의 핵심인 평준화를 유지하는 한 불가능하고, 학급 간 수준별 교육 중 총점 우열반은 몇십 년 전 이미 그 폐해를 경험한 바 있으며, 학급 내 수준별 교육은 현 상황에서 지나치게 미온적이고 소극적이다. 그렇다면 학급 간 과목별·수준별 교육이 대안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수준별 수업이 시작된 10여 년 전에는 자료가 미비해 상·중·하 수준의 교수·학습 자료를 개발하느라 교사들의 부담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수준별 자료도 풍부하게 개발되었다. 무엇보다도 2006년 개정 교육과정에 기초해 개발된 중등학교 교과서에는 다양한 자료와 문제가 수록된 익힘책이 포함되어 수준별 수업의 실시가 용이해졌다. 또한 그동안 수준별 수업을 위한 시간표 작성과 수업 운영에 있어서도 노하우가 축적돼 이전보다는 호의적인 상황에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수준별 수업은 이질적인 수준의 학생들을 공교육 체제 하에서 가르치는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이자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할 것이다.

박경미 홍익대 수학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