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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열심히 했죠. 남들이 밥맛 없는 여자로 보더군요”

중앙일보

입력

■ 비례대표 하면서 지역구 챙기는 것 양심이 허락 안 해
■ 대선 후 보건복지여성부 장관 하마평에 오르기도
■ 실력 있는 여성과 일하는 방법 모르는 남성 의원 많아
■ 자기 영달만 생각 않는 맑은 영혼이 18대 국회에 오셨기를

 이미지 대체 택스트

월간중앙 18대 총선 끝. 많은 현직 의원이 국회 재입성에 성공했다. 상당수 공천 탈락자들은 “억울하다”며 다른 줄을 잡아 여의도행 티켓을 다시 잡았다. 그러나 정작 억울한 이들은 따로 있다. 안명옥 한나라당 의원은 그 중 한 명이다.

국회의원을 종신제 정규직쯤으로 여기는 국회의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각 정당 공천심사에서 떨어지자 당을 나와서까지 다시 출마했다. 자신들은 반드시 국회에 남아야 한다고 여겼던 것일까? 일부 의원들은 특정인의 성(姓)을 따다 붙인 희한한 정당까지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그런 모습을 가장 가슴 아프게 바라본 사람 중 하나가 안명옥 의원이었을 것이다. 그는 17대 국회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한 의원으로 화제를 불렀다. 국회 본연의 임무인 입법활동 성적표만 보면 전체 수석이다. 그것도 압도적 1위다.

그런 그의 이름은 18대 총선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불출마했기 때문이다. 의정활동 최우수 의원의 불출마에 언론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안 의원은 오는 5월30일 국회를 떠난다.

일단 안 의원의 성적표부터 보자. 그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조사한 ‘17대 국회의원 법안 발의 및 가결에 대한 종합 평가’에서 1위를 차지했다. 종합평가 점수는 375점. 2위와 3위를 한 안상수(280점)·정성호(203점) 의원보다 멀찌감치 앞선 점수다.

그는 한나라당이 자체 조사한 의정활동 점수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월간중앙>의 자매지인 중앙일보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지난해 말 자체적으로 실시한 입법활동 평가 조사에서도 1위를 했다.

안 의원은 “국회가 국민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곳인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지만 국회에 대해 적잖은 실망을 한 듯 보였다. “양성평등 차원에서 보면 국회는 원시시대”라고도 했다. 지난 3월25일과 4월1일 두 차례에 걸쳐 안명옥 의원을 국회 의원회관 234호실에서 만났다.

- 왜 불출마했나?
“한나라당은 당규상 비례대표를 연임할 수 없다. 민주당은 총선 전에 당규를 고쳐 연임이 가능하다.”

- 당헌·당규 개정을 요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은 좀 있었는데, 나서서 과감히 요구할 수는 없었다. 당 지도부나 최고회의에서 결정해줘야 했는데…. 참 고루한 당이다.”

- 지역구 출마는 생각해 보지 않았나?
“그 동안 비례대표는 전국이 지역구라고 생각하고 그 역할에 충실했다. 다음 출마를 염두에 두고 지역구를 살필 시간도 여력도 없었다. 어떤 비례대표 의원은 임기 중 지역구를 다져 놓는 분들도 있더라. 나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 한나라당 경선 때 박근혜 전 대표를 도운 것이 영향을 미쳤다고 보나?
“…….”

안 의원은 말을 입 속에서 곱씹었다. 할 말이 많은 듯했지만 꾹 참는 눈치였다. 그는 지난 한나라당 경선에서 박근혜 전 대표를 도왔다. 그는 “박근혜 대표가 자신을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준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17대 총선에서 그는 한나라당 비례대표 후보 19번이었다. 한나라당은 당시 21석의 비례대표를 차지(열린우리당 23석, 민주노동당 8석)했다.

▶안명옥 의원실에 놓인 상패들.

“악법도 법이라고 생각할 뿐”

당시 탄핵 역풍으로 흔들리던 한나라당이 그나마 선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으로 ‘박근혜 효과’를 꼽는 정치 전문가가 많다. 이를 감안하면 안 의원의 말은 틀리지 않다.

- 당에 많이 섭섭하겠다.
“헌정 60년 사상 의정활동 1위를 한 첫 여성의원이 나다. 그런 점은 고려되지 않았다. 전략공천이라는 표현이 있던데, 이제 와서 말하지만 능력과 일을 기준으로 한다면 전략공천 1호여야 하지 않느냐고 말해준 분도 있었다. 하지만 악법도 법이라고 생각했다.”

- MB 진영에 서운한 점이 있나?
“(한참 고민한 후) MB가 최고 대통령이 됐으면 하는 생각으로 정말 열심히 뛰었다. 박근혜 팀도 묵묵히 최선을 다했다. 대통령에 당선되고 ‘국정의 동반자’라고 이명박 대통령이 말할 때 감동받았다. 그리고 믿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내 문제는 상관없다. 대선 때 한나라당 모두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서로 다 안다. 정권을 잡기 위해 그야말로 피눈물 나게 일했다. 그런데, 어떻게…. 거기(공천을 말하는 듯)까지도 이해할 수 있다. 정말 고마웠다고 한마디만 해줬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안 의원은 한때 보건복지여성부 장관 하마평에 올랐었다. 본인도 “욕심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의사 출신이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오래 활동했고, 발의한 법안 역시 의료·복지·여성·아동에 집중돼 있다.

한나라당 대선 캠프에서는 제6정책조정위원장을 맡아 보건복지분야 공약을 주도해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내각으로도 가지 못했고, 국회도 떠나게 됐다. 안 의원은 “핵심 실세가 MB 근처에도 못 가게 하더라”고 했다.

- 의정활동 이야기를 해보자. 임기 중 발의 건수가 143건이다. 열흘에 하나 꼴인데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 의원실 직원들이 고생 많았다. 거의 모든 법안을 의원실에서 만들었다. 전문가들 모셔다 밤새워가며 일했다. 토론회 하고, 공청회 하고, 법제처 협조 얻고, 행정부 설득하는 일이 임기 내 한 일의 전부다. 법안 하나하나 애정을 기울여 만들었다. 요즘 아동 유괴, 성폭행 문제가 심각한데, 지난해 4월 어린이보호구역에 폐쇄회로 텔레비전을 설치하고 유괴 방지 시스템 구축 등을 골자로 한 법안을 발의했었다.”

국회 의원회관 234호 안명옥 의원실은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보여준다. 의원실 벽면은 온통 입법 및 정책자료로 빽빽했다. 17대 국회 개원 첫날 1호 발의안을 낸 것도 그다.

발의 법안 중 48건이 가결되거나 대안폐기(각 국회의원이 발의한 법안이나 정부가 제출한 법률안이 유사할 경우 하나의 법으로 묶으면서 개별 법안은 폐기하는 것을 말한다)됐다. 이 역시 17대 국회의원 중 1위다.

- 다른 의원들 반응은 어떻던가?
“칭찬해주신 분도 많았고, 저보다 더 열심히 하시는 분도 계셨다. 하지만 어떤 의원은 ‘마구 만드는 것 아니냐’며 비아냥대기도 했다. 그것도 같은 당 의원이…. 정말 어이없었다. 이곳은 실력을 내세우면 불편해지는 곳이다. 나보다 잘난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의원들이 너무 많다. 어떤 의원은 나를 ‘밥맛 없는 여자’ 정도로 여기는 것 같더라. 좋은 법안을 만들기 위해 동료 의원들과 의기투합해 일해본 경험도 거의 없다. 슬프지만 사실이다.”

“국회에서 여성은 장식 수준”

- 여성의원이라는 점이 영향을 미쳤나?
“국회에 진정한 양성평등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정치권은 ‘여성’을 ‘데코레이션(장식)’ 정도로 여긴다. 양성평등이라는 인식도, 시각도, 관심도 없는 분들이 허다하다. 여성을 어미로, 아내로, 딸로 사랑할지는 모르지만 실력 있는 동료로 여기고 존중하는 문화는 없다고 보면 된다.”

- 왜 그런가?
“실력 있는 여성을 어떻게 대할지 모른다. 왜? 실력 있는 여자와 같이 일해본 경험도, 생각도 없으니까. 다 그런 것은 물론 아니지만, 많은 남성의원이 그렇다. 딸은 힐러리처럼 키우고 싶어하면서, 마누라와 동료는 힐러리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 남자가 많더라.”

-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안 의원은 실명을 기사화하지 말아달라며 P의원, L의원, 또 다른 L의원의 이름을 댔다. 이들은 새 정부 들어 승승장구하고 있다) 심지어 악수하는 자세에서도 남녀 의원을 구분하는 분도 있었다. 토론을 좀 하자면 뒷담화로 ‘안명옥은 여자가 버르장머리 없이 끼어든다’고 까지 한다. 의료사회에서는 그나마 여성이 10배 일하면 남성과 비슷하고, 30배 일하면 더 나아 보인다. 하지만 국회에서는 여성의원이 30배 열심히 일해도 인정받지 못하는 곳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 안 의원만 느낀 것은 아닐 텐데, 다른 여성의원들과 이런 이야기를 해봤나?
“여성 국회의원들이 뜻을 모아 연극 <나비>를 국회 의원회관에서 같이 주최해 보기도 했는데, 지속적으로 ‘같이 해보자’가 안 되더라. 각자 살아남아야 하는 촉박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뭉칠 기회도 없었다. 결국 ‘조용히 있자,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만 충실히 하자’로 마음을 바꿨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더 ‘투쟁’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든다.”

엘리트 의사이자 여성 국회의원 입에서 나온 ‘투쟁’이라는 단어는 낯설었다. 그는 “여성의원이 13% 정도밖에 안 되는데 30%는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바람과 달리 18대 국회에서 여성의원은 17대보다 2명 늘어나는 데(41명) 그쳤다. 안 의원은 “그나마 박근혜 대표가 가장 빠르게 여성에 대한 편견을 바꿔준 분으로 믿고 있다”고 말했다.

- 지난 4년간 지켜본 국회는 어떤 곳이었나?
“이곳은 오로지 국민을 위해 고민하는 곳이고, 그 방법론을 깨달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의사로서, 복지가로서 그렇게 애써도 변하지 않던 사회가 입법에 의해 변하는 것을 보고 ‘아! 이래서 입법부구나’ 하고 절감했다. 국회의 존재 이유는 국민의 행복이다. 국민이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곳이다. 재래시장에서 콩나물 파는 할머니의 피땀 어린 돈을 의원들이 받는다. 의원 한 사람이 4,900만 명의 국민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봤다. 의원 한 명이 ‘아니면 말고 식’으로 일하면 많은 국민이 상처를 받는다. 그래서 고심하고 고뇌해야 하는 곳이다.”

- 개인적 감상 말고.
“국회에 있으면서 큰 실망을 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진실은 따로 있는데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 놓고 진짜라고 믿어버리더라. 사실이 아닌 것도 말하면 사실이 되는 곳이었다. 품격도 없었다. 일만 열심히 하면 ‘너 정치력이 너무 없어’라고 하는 곳이다. 그런 분들이 행정부가 입법 편하게 하려고 다 만들어 갖다 바친 법안을 자기 이름으로 대표발의하고는 한다. 제발 자신의 영달만 생각하지 않는 맑은 영혼들이 18대 국회에 들어왔으면 좋겠다.”

“전문성 갖춘 비례대표 100명쯤 돼야”

- 국회에 바람이 있다면?
“국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전문성을 갖춘 비례대표가 더 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100명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의원들이 서로 다름을 인정했으면 좋겠다. 싸움할 때 말고, 법을 만들 때도 팀워크를 이루는 문화도 절실하다. 개인적으로는 열심히 일하다 떠난 어떤 여성의원이 있었다고만 기억해 줬으면 영광이겠다.(웃음) 한 가지 부탁이 있다면, 발의해 놓고 통과 안 된 법이 너무 많다. 정말 열심히 만들었고,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관련 법안 정책자료집도 다 만들어 놨다. 18대 국회에서 의원들이 내가 발의한 법안들을 다시 검토해 재발의해주시기 바란다. 특히 초선의원들에게 드리는 힌트다. 아! 또 한 가지. 타이거 우즈가 ‘기록은 깨라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는데, 18대 의원이 내 기록을 깨줬으면 좋겠다.”

털어놓자면, 안명옥 의원은 “떠나는 마당에 국회를 실컷 흉봐달라”는 기자의 요구를 세 차례나 거부했다. 인터뷰하면서도 “내 말 때문에 다른 분이 상처받으면 안 되는데…”를 연발했다. 그나마 조르고 꾀어 들은 이야기가 이 정도다.

그는 자신이 발의한 법안을 묶은 70여 권의 정책자료집을 남기고 국회를 떠난다. 그가 “내 새끼들 같다”고 말한 그 법안들이 소리 없이 사라질지, 아니면 법률이 돼서 세상에 공포될지는 오는 5월31일 임기를 시작하는 새 국회의원들의 몫이 됐다.

글 김태윤 월간중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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