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그늘 벗어나 ‘삼바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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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호 34면

지난 4~8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열린 미주개발은행(IDB) 연차총회. 브라질 재무장관 기도 만테가 등 남미 지역 경제·금융 정책 담당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의 표정은 마이애미의 초여름 날씨만큼이나 밝았다. 여유와 자신감이 넘쳤다.
“우리는 신용경색 등 외부 충격을 견뎌낼 수 있도록 무장돼 있다.”

호황 지속하는 남미 경제

만테가 브라질 재무장관은 기조연설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뒤이어 연단에 오른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은 “미국이 주택시장 조정을 겪고 있지만 다행히 남미 경제는 예상과 달리 금융시장 불안을 잘 견디고 있다”고 화답했다.

지난주 미국 최대 보험회사인 AIG는 브라질과 칠레 등 남미에 투자하는 사모펀드를 마감했다. 애초 5억 달러 정도를 예상했으나 6억9190만 달러(6900억원)가 몰려들었다.
미국이 재채기를 하면 감기에 걸리는 게 남미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미국의 경기 침체와 신용경색이 가시화하고 있지만, 남미 경제는 호황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브라질·칠레·페루 등 남미 핵심 경제권의 올 성장률이 지난해보다 다소 낮아지고는 있지만 세계 어느 곳과 비교해도 서브프라임 외풍을 잘 견디고 있는 곳으로 평가받는다.

脫미국
브라질 경제중심지인 상파울루 거리에는 요즘 중국 비즈니스맨들이 부쩍 눈에 많이 띈다. 말쑥한 정장 차림인 이들은 브라질에서 철광석 등 원자재와 곡물을 사들이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브라질 사람들은 그들을 ‘새로운 고객’이라고 부른다. 미국·유럽과 다른 고객이라는 뜻이 들어 있는 말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최근 발표한 ‘신흥시장 경제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남미 국가들의 미국에 대한 수출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10% 선이었다. 이에 비해 중국과 인도 등 미국 이외 지역에 대한 수출은 GDP 대비 25% 수준이었다. 미국 이외 지역 수출은 2000년까지만 해도 15% 선이었다.

“남미 좌파 정권들의 ‘탈미국-시장 다변화’ 정책이 효과를 발휘한 덕”이라고 매킨지의 남미 담당인 로베트로 판토니는 진단했다. 그는 “2000년 이후 브라질과 칠레·베네수엘라 등이 앞장서 중국과 인도 등 지역과 교역을 늘려왔다”며 “그 결과 남미의 수출시장이 미국 일변도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때마침 불어닥친 중국·인도 등 신흥시장의 급부상과 맞아떨어져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새 엔진
브라질 정부가 제조업 강화 차원에서 동남부 미나스제라이스주에 건설한 베침 자동차공단은 “금과 다이아몬드가 발견된 18세기 말 이후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지역 언론은 전했다. 브라질에 불어닥친 ‘마이 카 붐’ 때문이다. 원자재 호황 등으로 안정적인 일자리를 갖게 된 이 나라 서민층이 소형차지만 ‘마이 카’를 장만하기 시작했다. 운전면허 갖기 붐도 일고 있다. 할부금융 회사들도 그들의 수입이 안정적이라고 판단하고 이전과는 달리 선뜻 돈을 빌려주고 있다. 덕분에 브라질 자동차 판매는 2002년 이후 연 15% 정도씩 늘고 있다.

칠레 경제도 뜨겁다. 약 50개 나라와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고 구리와 포도주, 수산물을 수출하는 칠레 경제는 요즘 내수까지 활기를 띠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5%대의 성장세가 예상되고 있다. 칠레 중앙은행은 경제 성장률이 전망치(올해 4.5%)를 상회하자 금리인상까지 고려하고 있다. 페루도 마찬가지다. 남미 주요국 경제는 ‘원자재값 상승→내외국인 투자 증가→고용창출→내수 증가’라는 선순환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브라질 중앙은행 전 총재인 아미니오 프라가는 IDB 총회 연설에서 “남미 경제의 호황은 원자재값 상승 덕분만이 아니다”며 “새로운 엔진이 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엔진은 바로 고용 안정에 따른 내수 증가다. IDB에 따르면 2002년 이후 남미 경제가 연평균 5.6% 정도 성장했는데, 이 가운데 3.5%포인트 이상이 내수 덕분이었다. 1990년대의 2%대와 비교해 눈에 띄게 높아진 것이다.

경제 개혁의 성과
‘시장개방·민영화·규제폐지…’. 남미 국가들이 금융위기를 겪을 때마다 IMF의 권유를 받아 반강제적으로 쓴 처방이었다. 남미의 좌파들은 미국의 음험한 간계라고 주장하며 IMF 처방을 강하게 비판했었다. 그런데 브라질·칠레 등 남미의 좌파 정권들은 요즘 자발적으로 이런 개혁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워싱턴의 요구가 아니라 남미 정권들이 자체 필요에 의해 경제개혁을 추진했고, 이제 성과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브라질 중앙은행 전 총재인 프라가는 말했다.

과거 남미의 우파 정권들은 IMF가 요구한 정책을 수동적이고 기계적으로 따랐다. 그러면서 피해를 본 서민계층의 반발을 제어하지 못했다. 반면 지금의 좌파 정권들은 개방정책과 원자재 호황으로 늘어난 재정수입을 착복하지 않고 교육과 사회안전망·인프라 확충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칠레와 페루 정부는 자녀를 일정 기간 학교에 보내면 부모에게 돈을 주는 정책을 쓰고 있다. 가난의 대물림을 끊기 위해서다.

그 결과 외국 투자가와 국민이 동시에 정부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이는 독재와 우파의 부패로 점철된 남미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일이다.

시간과의 싸움
남미 경제는 원자재 시장의 호황과 맞물려 경기도 좋아지는 흐름을 10~15년 주기로 반복하곤 했다. 국제 원자재값이 뛰면 남미 경제의 맥박이 강해졌다가 원자재값 하락과 함께 경제가 급속히 가라앉는 순환을 되풀이됐다. 극심한 빈부와 교육격차 때문에 원자재 호황의 혜택이 저소득 계층에까지 퍼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패한 집권 계층이 성장의 과실을 해외로 계속 빼돌리다 보니 내수 기반은 커질 틈이 없었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브라질 등 남미 좌파 정권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쓰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저소득층 교육을 강화하는 등 인적자본 투자를 늘리고 있다. 하지만 교육투자 등으로 중산층이 늘고 내수가 탄탄해져 외부의 충격에 견딜 수 있는 경제구조를 갖추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워싱턴 포스트의 남미 담당 칼럼니스트인 마르셀라 산체스는 “요즘 남미 경제 흐름이 희망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원자재 가격의 조정이라는 진짜 시험을 치러봐야 남미가 확실히 달라졌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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