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호야, 수영 말고 다른 도전도 해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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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팔을 이렇게 구부려서 물을 걷어 올리듯 치는거야.” 미국 올림픽 수영 금메달리스트 토이셔<右>가 자폐아 수영선수 김진호 군의 팔자세를 바로 잡아주고 있다.

“진호야, 100m 자유형 한 개만 더 하자.”

코치의 목소리가 수영장 안에 쩌렁쩌렁 울리자 건장한 체격의 청년이 물살을 힘차게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22일 오후 부산 사직 실내수영장. 자폐장애 수영선수 김진호(21)군이 매일 훈련하는 곳이다.

지난주 동아수영대회에 출전해 비장애 선수들과 실력을 겨뤘던 진호. 그에게 이날은 원래 달콤한 휴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평소와 다름없이 훈련장을 찾은 것은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전 미국 국가대표 선수로 올림픽 수영 금메달리스트인 크리스티나 토이셔(29)가 진호를 만나고 싶다며 부산을 찾은 것이다.

토이셔는 1996년 애틀랜타에서 800m 여자 자유형 계주 금메달을, 2000년 시드니에서 200m 자유형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은퇴 후 글로벌 교육기업인 EF에듀케이션퍼스트에 근무하고 있는 토이셔는 한국인 동료를 통해 진호를 알게 됐다. 장애를 이긴 진호의 이야기에 감명받은 그는 수영선수로서 도움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국 출장 길에 진호를 위해 하루를 비웠다.

“우와, 하루에 네 시간을 쉬지 않고 헤엄 친다고요?”

체력훈련 한 시간 반, 수영 네 시간. 매일 이어지는 진호의 훈련 스케줄을 들은 토이셔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제가 한참 운동할 때도 오전·오후 두 시간씩만 훈련을 했거든요. 진호의 체력도 대단하지만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집중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워요. 아마 비장애인들도 네 시간씩 집중하라면 어려울 것 같은데요.”

컬럼비아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토이셔가 자폐 수영선수인 진호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자폐아들이 미술이나 음악에 특별한 재능을 보이는 경우는 미국에도 많아요. 소리 자극 같은 것에 민감한 경우가 많거든요. 하지만 진호처럼 운동을 하는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코치의 지도에 따라 레인을 계속 오가는 진호의 모습을 지켜보던 토이셔가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에 뛰어들었다.

진호가 낯설어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미국에서 수영 선생님이 오셨다”는 엄마의 얘기에 진호도 곧바로 마음을 열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와 장애 수영선수의 특별한 훈련은 그렇게 시작됐다.

진호는 올해 8월 폴란드에서 열리는 지적장애인 유럽선수권대회에 출전한다. 2005년, 2007년 세계정신지체장애인 수영대회 배영 200m 우승에 이어 3연패를 노리고 있다. 하지만 최근 기록이 만족스럽지 않아 토이셔의 지도가 반가울 수밖에 없다.

토이셔는 “미국 선수들이 일반적으로 받는 훈련 기법을 알려주겠다”며 레인을 몇 번씩 오가며 진호의 영법을 관찰했다.

“진호는 발 차는 자세도 훌륭하고 힘이 굉장히 좋네요. 다만 중심이 흐트러지는 것과 팔 자세를 교정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부산 사직실내수영장 앞에서 김진호<左>군과 크리스티나 토이셔가 함께 했다. 사진찍을 때마다 ‘V’자를 그리는 진호를 따라 토이셔도 같은 포즈를 취했다.

한 시간으로 예정됐던 훈련이 세 시간을 훌쩍 넘어섰다. 토이셔가 “실력을 겨뤄 보자”며 진호와 경주를 시작했다. 지는 걸 아주 싫어한다는 진호의 팔이 먼저 닿았다. 활짝 웃는 두 사람의 하이파이브가 이어졌다.

토이셔의 지도는 수영장 밖으로 이어졌다. 진호에게 꼭 해주고 싶었다는 이야기는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하지만 수영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각종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며 미국 수영계의 유망주로 주목받던 토이셔는 컬럼비아 대학에 진학했다. 장학금 지원 등을 약속한 여러 대학의 러브콜을 마다하고 수영팀이 약한 이 대학을 선택한 토이셔는 뉴욕 타임스 등 미국 언론에서 화제가 됐다. 하지만 토이셔는 “선수 생활 이후를 대비한 선택이었다”며 대학을 마친 뒤 프랑스의 경영대학원 ‘INSEAD(Institut europen d’administration des affaires)에서 공부를 이어갔다.

“수영은 제가 살아가는 과정이고 도전의 하나였죠. 하지만 삶의 목표는 아니었어요. 언제까지나 챔피언일 수는 없으니까요. 은퇴 이후를 대비해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진호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자폐를 이겨 가는 과정에서 수영을 시작했고, 좋은 결과가 있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거예요. 선수생활을 마친 이후에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기록에만 매달리지는 말라고 얘기해 주고 싶어요”

말을 마친 토이셔가 가벼운 포옹으로 인사를 대신하자 진호가 일러주지도 않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선생님, I love you(사랑해요).”

부산=글·사진 홍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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