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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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자리에 앉으며 여인은 아리영을 응시(凝視)했다.강한 그 눈길이 당혹스러워 목례를 하자 서둘러 자기 소개를 했다.
이름은 정길례(鄭吉禮).늦깎이 화가 지망생으로 전통미술에 흥미가 있어 공부하러 나온 것이라 했다.딸 하나,아들 하나를 두웠는데 다 장성했으니 하고싶은 그림공부를 할까 한다고도 했다.
출판사를 한다는 서여사나 자녀를 다 키우고 이제부터는 자기 공부 길로 나서겠다는 정여사나 모두 우러러 보였다.그러나 이방인(異邦人)같았다.
능력도 의욕도 없는 자신이 초라하고 부끄러웠다.이 교실 안에서의 이방인은 거꾸로 아리영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여사는 매력있는 여성이다.
갸름하고 거무스레한 얼굴의 빛나는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풍성한 검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틀어올린 것이 자연스러우면서도요염해 보였다.
언뜻 『주홍글씨』의 여주인공 헤스터 프린이 떠올랐다.
『풍성한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의 여인.그녀는 호화로운 아름다움에 끌리는 동양인의 특성같은 것을 지니고 있었다….』 너새니얼 호손은 작품 속에서 헤스터를 이렇게 묘사했다.정여사를 방불케 하는 표현이다.복숭아처럼 크고 딴딴한 씨앗을 속에 감추고 있는 여인이라는 인상도 받았다.
서여사는 달랐다.
그녀의 훤한 얼굴처럼 밝고 넉넉했다.전문직을 가진 여성의 자신감이 서여사를 여유롭고도 발랄하게 돋보여주고 있었다.식견도 높아보였다.그녀에게 끌렸다.어머니가 살아 있으면 저 연배쯤 되었을 것이다.
아리영은 어느 새 아버지의 「상대」를 물색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상대라 해봐야 이젠 재취감을 고를 자신이 없었다.말벗이라도 나타나주면 얼마나 고마울까 싶었다.
정년퇴직은 했을망정 아버지는 아직 너무나 젊고 멋있다.서여사라면 아버지의 좋은 말벗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강의실에 모여 앉은 이 서른명의 여성들.모두 기혼자지만 더러혼자 사는 이도 있었다.
서여사도 그런 여성 중의 하나다.남편은 오래 전에 돌아갔고,아들 둘이 있다고 했다.맏아들은 미국에 가 있고,둘째가 사업을도와준다며 미소지었다.어머니다움이 풍겼다.
『어떤 책을 주로 펴내고 계십니까?』 『한국학에 관한 책이지요.그 중에서도 고대에 대한 것이 많아요.우리나라의 고대사라든지,고대문학,고대미술,고대민속…그런 책들이에요.』 고대미술.
귀가 번쩍 뜨였다.외할아버지의 수집품 목록은 서여사의 자문을받아 만들면 되겠거니 몹시 반가웠다.아버지를 서여사와 만나게 할 명분이 생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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