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한노총의 판 깨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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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철근 정책기획부 기자

19일 낮 서울 프라자호텔 5층 비즈니스 센터. 김대환 노동부 장관 취임 후 노사정이 첫 공식 상견례를 하는 점심 간담회에 참석하러 온 한국경영자총협회 이수영 회장은 황당한 표정이었다.

정작 대화 상대인 金장관과 한국노총 이남순 위원장은 약속시간이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李회장은 씁쓸한 표정으로 간담회장을 떠났다. 이날 모임을 취재하기 위해 자리를 지켰던 수많은 취재진도 마찬가지다. 탄핵정국의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노사정이 화합하는 모습을 보이자는 취지로 애써 마련한 간담회는 완전히 물거품이 된 것이다.

노민기 노동부 노사정책국장은 "李위원장이 불참 의사를 밝혀와 오늘 모임은 취소됐다"고 설명했다.

金장관은 李위원장의 불참 사실을 미리 알았으나 李회장은 제대로 통보조차 못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李위원장은 불참 이유로 두 가지를 꼽았다. 대기업 임금 동결을 골자로 한 경총의 올해 임금협상 지침과 이번 간담회에 민주노총이 빠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궁색한 변명에 불과하다. 경총의 임금협상 지침은 17일 발표됐으며 민주노총은 애초부터 노사정 간담회에 참석하겠다는 뜻을 밝힌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문제 삼았다면 노사정 간담회를 연다고 18일 언론에 발표하기 전에 불참 의사를 통보했어야 옳았다.

더욱이 노사정은 이날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 동요하지 않고 각자의 위치에서 본분을 다한다는 등 4개 항의 합의문까지 마련한 상태였다.

李위원장은 "사용자 측이 임금 동결을 고집하고 있는데 알맹이도 없는 대화 자리에 나갈 필요가 있느냐"는 내부의 비난 여론을 의식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李위원장이 공식적인 약속을 일방적으로 깬 것은 너무 무책임한 행동이다. 재계와 정부에 불만이 있으면 만나서 직접 따져야 한다. 지금은 불신을 접고 노사 안정을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한국노총의 성의있는 자세를 바란다.

정철근 정책기획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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