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헌법 뭉개는 ‘일본 자위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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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일본은 1945년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한 뒤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약속을 헌법 9조에 명문화했다. ‘일본 국민은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전쟁과 무력의 사용을 영구히 포기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헌법 9조는 상처투성이다. 명칭만 군대가 아니지, 자위대의 군사력은 이미 세계 수준이다.

그뿐 아니라 일본은 줄기차게 해외에서의 군사활동 영역을 넓혀 왔다. 2004년 시작된 항공자위대의 이라크 파견이 대표적이다. 후방 지원이 명분이었지만 항공자위대는 중무장한 미군 전투 병력과 군수 물자를 수송했다. 그러자 일부 시민이 항공자위대의 이라크 파견은 헌법 9조를 위반했다며 전국 지방법원에 자위대 파견 중지 등의 소송을 냈다. 일본에는 헌법재판소가 없어 법원이 위헌 여부를 결정한다.

지방법원들은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지만, 17일 항소심에서 나고야(名古屋)고등재판소가 보수적인 일본 법원으로선 드물게 위헌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판결 이후 일본 정부의 행동은 정말 납득하기 힘들다. 일 정부는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이라며 이라크 파견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항공자위대의 공군참모총장은 개그맨의 유행어를 빌려 “그딴 것 관계없어”라는 말까지 했다. 마치 조롱처럼 들렸다. 법원이 헌법과 관련해 내린 판결을 정부가 이처럼 무시한다면 과연 법치주의가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헌법 9조는 사실상 사문화된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일 정부의 태도에 대한 일본 사회의 반응을 보면서 또 다른 걱정이 생겼다. 일본변호사연합회장이 정부에 대해 판결 준수를 촉구하는 성명을 내기는 했지만, 대체로 침묵하는 분위기다. 오랜 경제 침체로 보수화된 일본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이런 분위기라면 아베 신조 전 총리 등 일본 우파 정치인들이 오래전부터 주장해온 대로 군대 보유를 인정하는 쪽으로 헌법이 개정될 가능성도 높아졌다. 일본은 침략 역사를 제대로 반성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주변 국가로부터 들어왔다. 그런데 평화헌법이 사라진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 동북아시아에 새로운 긴장이 생길 것은 뻔하다. 이명박 대통령과 후쿠다 야스오 일본 총리가 21일 새로운 화합을 강조했지만, 갈수록 빨라지는 일본의 보수화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김동호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