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전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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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호 34면

에너지 위기는 이중으로 소비국들을 압박하고 있다. 가격 폭등에 따른 비용 부담만도 엄청난데 비싼 값을 주고도 물건을 안정적으로 확보한다는 보장조차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가 급등으로 이윤이 커지고 주머니 사정이 좋아지면 산유국들이 너그러워질 법도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석유자원에 대한 정부 통제를 갈수록 강화하고 외국 기업의 참여를 배제하는 등 21세기형 자원민족주의로 치닫고 있다. 석유의 무기화 앞에 시장논리가 설 땅을 잃고 유가 급등이 ‘석유국가(Petro-States)’들을 탄생시키는 ‘풍요 속의 역설’을 불러왔다.

에너지 안보에 세계가 조바심을 내면서 자원의 안정적 확보를 위한 외교전쟁은 이미 불이 붙었다. 국제에너지기구(IEA) 조사에 따르면 주요 국가의 에너지 자급률(원자력 포함)은 러시아가 181%로 가장 느긋하고 캐나다 148%, 영국 96% 순서다.
중국이 94%로 그 다음이지만 중국은 1993년 석유 수입국으로 돌아섰고, 그 10년 만인 2003년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소비대국이 됐다.

게다가 2030년까지 세계 석유 수요 증가량의 40%가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 개발도상국 몫이 된다는 전망이다.
에너지 외교전쟁의 주 전선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비교적 새 유전이 많은 아프리카 지역이다. 중동 산유국들은 대부분 국영 석유회사가 소유·관리하고 있어 유전 개발 참여를 통한 제도적 진출 여지는 거의 없다. 제한된 외국기업 참여 지분은 서구의 석유 메이저들이 오래전부터 굳혀 놓은 상태다. 따라서 2010년 이후 세계 석유 및 가스 수요의 25%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이 중동의 대체지로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중국은 아프리카 차드와 세네갈·리베리아에 이어 이 지역 최대 수입처로 앙골라를 확보했고, 중앙아시아에서 캐나다 석유회사 소유의 페트로카자흐스탄을 인도와 경쟁한 끝에 인수했다. 인도는 최대의 해외투자 사업으로 러시아의 ‘사할린-1’ 유전을 확보했다. 중앙아시아의 석유 및 가스를 이란과 파키스탄을 거쳐 인도로 끌어오는 야심 찬 5개 송유관 건설 프로젝트도 선보였다.

중국과 인도는 서로 간의 경쟁이 상대방에 값만 올려준다고 판단해 자원 확보에 공동전선을 펴는 이색 합의까지 해놓고 있다.
일본은 2006년 ‘신국가에너지 전략’의 대외전략으로 ‘히노마루 유전’이란 이름의 자주 개발 유전 비율을 현재의 15%에서 2030년까지 40%로 늘릴 것을 천명했다. 자원이 빈약한 프랑스는 자주 개발 비율이 98%, 이탈리아도 55%다.

일본은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4개국 및 아프가니스탄(옵서버) 등과 ‘중앙아시아 플러스 일본 대화’ 협의체를 만들어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이 지역 상하이협력기구(SCO)에 맞서는 모양새를 취했다. 일본이 어렵게 45% 지분을 따낸 ‘사할린-2’ 천연가스 프로젝트 대해 러시아 정부가 갑작스러운 동결 조치를 취하고, 카스피해를 둘러싸고 이란-러시아-중국의 ‘에너지 축’이 그려지는 등 영향력 게임은 확전일로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에서의 기득권을 업고 제2의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해당하는 유라시아 석유 가스동맹을 창설해 세계 에너지시장의 공급 구도 재편을 노리고 있다.
문제는 한국 자원외교의 입지다. 중국과 일본에는 자본 공세에서 밀리고, 다국적 에너지 기업에는 기술에서 밀린다. 이런 상황일수록 상대방에 거부감을 주는 자원외교라는 구호보다 줄 것은 주고 관계를 긴밀히 하면서 이들의 마음을 얻는 섬세한 접근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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