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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슈바이처’하늘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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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20년간 빈자들에게 무료 의술을 펼쳐온 ‘영등포의 슈바이처’ 선우경식(사진) 요셉의원 원장이 18일 오전 4시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별세했다. 63세.

빈소가 마련된 성모병원 장례식장에는 요셉의원 자원봉사자와 가톨릭 신자 등 900여 명이 찾아 고인을 기렸다. 위령미사에서 의정부교구 이성만 신부는 “모두가 좋은 곳과 높은 곳을 찾는 세상에 가장 낮은 곳을 찾은 선우 원장의 빛을 나누자”고 애도했다. 정진석 추기경은 애도메시지를 통해 “선우 원장님은 살아 있는 성자(聖者) 같았다. 그처럼 훌륭한 분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던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빈소를 지키던 박문열(48)씨는 “알코올 중독으로 선생님께 치료를 받았다. 6년 전 대형운전면허를 땄을 때 환하게 웃으며 기뻐해 주셨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가톨릭사회복지회 회장 김운회 주교는 “알코올 중독자에게 육체적 치료뿐 아니라 숙소를 마련해주고 재활을 돕는 참된 치유를 하셨다”고 말했다. 김 주교는 “항생제 몇 알이면 살릴 수 있는 아이들이 죽는 것을 막자며 동남아에 함께 가자고 하시더니 꿈을 이루지 못하고 너무 빨리 가셨다”고 안타까워했다.

오후 10시쯤 빈소를 찾은 김성이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은 “평생 독신으로 사셨는데 노숙자와 결혼하신 것 아니냐. 국민으로서 (고인이) 자랑스럽고 공직자로서 부끄럽다”고 말했다. 김 장관은 “국가가 할 일을 대신 하신 셈인데, 요셉의원에 공중보건의를 파견하는 등 국가가 지원할 방안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덧붙였다.

선우 원장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참봉사의 원칙을 지켰다. 그는 돈이 생기면 환자에게 나눠줄 약을 샀다. 길에 쓰러진 노숙자를 보면 식당에 데려가 밥을 먹였다. 겨울철엔 노숙자들에게 이불을 사다 날랐다. 하지만 자신의 봉사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그는 1987년 8월 서울 신림동에 요셉의원을 세웠다. 97년 현재의 영등포 쪽방촌으로 옮겨왔다. 지금까지 42만여 명의 노숙자, 알코올 중독자, 외국인 노동자 등이 무료 진료를 받았다.

선우 원장은 “돈 없는 사람이 갈 수 없는 병원이 싫어 요셉의원을 열었다”고 말했다. 그는 수많은 빈자를 치료했지만 일에 파묻혀 정작 자신이 암에 걸린지도 몰랐다.

2005년 위암으로 쓰러진 뒤에도 선우 원장은 청진기를 손에 들고 노숙자들을 진료했다. 암 투병으로 머리카락이 다 빠졌는데도 넉넉한 웃음으로 주위를 편안하게 했다고 한다.

선우 원장은 봉사를 ‘희생’이 아니라 ‘축복’이라 여겼다. 그는 평소 “환자들은 내게 선물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귀한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기에 나는 항상 감사한다”고 말했다.

가톨릭 신자인 그의 장례는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장으로 치러진다. 장례미사는 21일 오전 9시 천주교 서울대교구 명동성당에서 열린다. 장지는 경기도 양주시 길음동 성당 묘원.

강기헌·임주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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