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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안 깎아주면 안 갚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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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서울 신월동에 사는 신모(34)씨는 3개월 전 A신용카드에 연체한 1800만원을 대환대출로 바꾼 뒤 매달 착실히 돈을 갚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난 17일 카드회사에 전화를 걸어 "신용불량자가 되어 배드뱅크의 혜택을 받는 게 낫다"며 "앞으로는 빚을 갚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A사의 채권회수 담당직원이 다시 연락을 하자 그는 "이자를 배드뱅크 수준으로 낮추거나 원리금 감면을 해주지 않으면 절대 빚을 안 갚겠다"며 아예 접촉을 피하고 있다.

정부와 금융기관이 최근 배드뱅크 등 신용불량자 지원방안을 잇따라 발표하자 빚을 갚지 않겠다는 '배짱 채무자'가 급증하고 있다.

특히 상당수 채무자들은 배드뱅크 지원 대상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향후 추가대책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면서 무작정 빚 상환을 미루고 있다.

이에 따라 은행과 신용카드사의 채권 회수금액은 지난해 말보다 20~40%가량 줄었다. 또 장기연체자가 신용불량자로 등록되지 않도록 금융사가 실시하고 있는 연체금의 대환대출 전환율도 지난해 말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은행과 신용카드사들은 최근 빚 독촉을 자제하라는 금융감독 당국의 요청에 따라 채권추심을 강화하지도 못한 채 고민하고 있다.

A신용카드사의 채권회수 담당자는 "9개월 이상 장기 연체자에 대한 회수율이 지난해 말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면서 "요즘은 아예 빚을 안 갚겠다며 연락을 끊는 연체자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B은행의 채권회수 담당 金모(34)씨는 이달 들어 "은행에 갚은 돈을 되돌려 달라"는 채무자의 억지 요구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金씨는 "배드뱅크에 지원신청할 테니 이미 갚은 돈을 되돌려 달라는 채무자가 하루에 2~3명쯤 된다"고 말했다. B은행은 이달 들어 채권 회수금액이 지난해 말보다 30%가량 줄었다.

D신용카드사는 지난달까지 연체액을 대환대출로 바꾼 사람이 연체자 10명 중 6~7명꼴이었지만 이달에는 2~3명으로 줄었다.

'배짱 채무자'들은 ▶무조건 안 갚겠다는 '막무가내형'▶배드뱅크로 갈 수 있도록 대환대출을 해지해 달라는 '읍소형'▶욕설을 하며 고발하겠다는 '협박형'▶원리금을 깎아 달라는 '적반하장형'▶추가 탕감안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지능형' 등으로 나뉜다.

여기에 연체경력이 없던 채무자까지 원리금을 꼬박꼬박 갚는 것보다 신용불량자가 돼 지원을 받는 게 낫다고 판단해 일부러 연체를 하는 사례마저 나타나고 있다. 배드뱅크의 지원 기준(5000만원)보다 빚이 적은 신용불량자들은 오히려 연체금을 5000만원 한도까지 늘리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기업 고객상담원으로 일하는 崔모(30)씨는 유흥비로 신용카드를 마구 써 1000만원을 연체했지만 얼마 전 갚으라는 독촉전화가 오자 채권회수 담당자가 화를 내도록 유도한 뒤 이를 녹음했다. 崔씨는 그 후 신용카드사를 당국에 고발하겠다며 채무변제를 요구했다.

금융계 관계자는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돈을 갚지 않은 사람과 빚을 갚으려고 애써 노력하는 사람을 제도적으로 차등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창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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