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도시 건축 순례] 5. 태양의 도시 찬디가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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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사당을 바라보고 있는 광장(上)은 폭 440m에 달하는 엄청한 크기와 방대한 규모로 시대를 뛰어넘는 인도의 정신적 자유를 상징한다. 통상적인 건축의 문법틀에서 벗어난 새도시를 그린 르 코르뷔제의 찬디가르 행정구역 배치도(下).

요즘은 업무 때문에도 다른 나라의 도시들을 자주 기웃거리고 있지만 오래 전부터 나는 건축학습을 이유로 곧잘 여행길에 올랐다. 좋은 건축을 익히는 일은 도면이나 사진을 통해 할 수 있긴 하되, 현장을 떠나 있는 한 상상 속의 재현일 뿐이다. 한 장소에 고정되어 그 속에서 삶을 만드는 것에 목적이 있는 건축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현장에 가서 진실을 마주하여 지니고 있던 환상을 깨는 일밖에 없다. 바로 이 장소성(場所性)이 건축을 이해하는 핵심적 요소라는 명분으로 나는 여행을 즐긴다.

여행을 많이 했으니 가장 인상 깊은 도시가 어딘가를 가끔 질문받는데, 기대하는 답은 아마도 역사가 오랜 유럽의 어느 아름다운 마을이거나 엄청난 건축이 있는 도시겠지만, 내 답변은 그 기대와 달리 인도에 있는 바라나시다.

그러니까 10년 전이었다. 당시 나는 '4.3그룹'이라는 건축조직의 일원이었다. 이 그룹은 한국 건축의 담론 형성을 목표로 의기투합한 젊은 건축가들이 모여 만든 조직으로, 치열한 논쟁과 전시 등을 통해 우리 건축계에 작지 않은 자극을 준 바 있다.

매년 테마를 정하여 해외 건축답사를 가곤 했는데 1994년에는 인도를 택하였다. 인도라는 나라 자체가 가진 매력 때문이었지만 건축하는 우리에게는 20세기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찬디가르 신도시에 대한 관심이 인도행을 부채질한 것이다. 기행을 떠나기 전 수 차례의 세미나와 많은 자료들을 섭렵한 후 모두들 많은 지식을 공유하게 되었으나 나의 관심은 유독 바라나시에 가 있었다.

바라나시는 인도에서도 가장 성스러운 도시라고 적혀 있었다. 그 도시에는 인도인들이 평생 걸려 죄를 씻으러 오는 갠지스 강이 흐르는데 그 강가에는 우리의 일상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전개된다. 가트라는 이름의 축대 위에 쌓인 나무더미와 함께 불타는 시신들, 킁킁거리는 개들과 그 옆에 한가로운 소들, 강물 위에는 타다 남은 재가 쓸려 가고 그 아래는 수많은 이들이 계단을 타고 강으로 들어가 몸을 씻거나 그 강의 물을 마신다. 더러는 이 강에서 빨래도 하고 장사도 하며 구걸도 하고, 남의 운명을 전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계단에서 강을 바라보고 정좌하여 끝없는 명상에 빠지기도 하고, 혹은 그러한 모습으로 죽음을 기다린다.

모래언덕 너머로 붉은 태양이 떠오르면 이 도시를 다스리는 파괴의 여신 시바가 자애를 베풀듯, 강가의 풍경은 붉게 물들고 계단에는 또다시 연기가 피어 오른다.

쇼크였다. 이미 책에서 보았음에도 그랬다. 책 속의 사진은 정지된 풍경이어서 그랬을까. 내 뇌리에 박제된 사진 속의 물체 하나 하나가 죄다 현실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삶과 죽음이 동시에 있었으며 부유와 빈곤이 다른 단어가 아니었다. 건강과 질병, 환희와 고통, 성과 속의 구분이 불가능하였으며 공간도 없고 그것을 꿰는 시간도 없는 그런 곳이었다.

우리 모두는 허무주의자가 되어 그들의 불가해한 행복을 망연자실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몇몇 동료 건축가는 바로 전날 답사한 코르뷔지에의 찬디가르 신도시를 몹시 비판하였다. 도무지 인도의 정신을 담아내지 못한 현대 도시일 뿐이라는 것이며, 코르뷔지에 자신의 건축언어만을 인도의 땅에 덧대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과연 그럴까.

'전쟁 여신의 성(城)'이라는 뜻의 찬디가르는 펀자브주의 수도이며 뉴델리에서 북쪽으로 약 260km 떨어진 곳에 있다. 1947년 인도가 독립했을 때, 펀자브 지방의 서쪽 지역을 파키스탄에 내주면서 그곳 주민들이 이주해옴에 따라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 당시 새로운 가치를 구현할 필요가 있던 네루 총리에게 찬디가르 신도시 건설은 국가적 명제였다. 네루의 미국인 친구인 앨버트 마이어가 도시의 최초 윤곽을 그리고 코르뷔지에에게 최종적으로 위임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설계비가 하도 낮은 금액이어서 코르뷔지에는 망설였다고 한다. 그러나 새로운 도시에 대한 수많은 제안을 해왔지만 실현되지 않아 절치부심하던 그는 이 기회를 뿌리칠 수 없었다.

자신의 건축이념을 부각해 마이어의 설계를 보강한 최종 도면을 보면, 이 도시에는 강렬한 축이 있어 도시의 모든 조직이 이 축에 의해 시작된다. 도로는 7개의 등급으로 나뉘어 위계 질서를 가지고 있으며 모든 지역은 주거.상업.업무.행정.공원 등 용도별로 구분되어 있다. 이뿐 아니라 그는 인도가 속한 농경사회의 상징인 곡선은 배제하고 직교체계에 의거해 견고한 직각의 도시를 만들어 냈다. 사실 이는 근대산업도시에 대한 네루의 희망과 기계미학에 대한 코르뷔지에의 믿음의 결과였다.

이 도시의 머리에는 행정관서가 배치되어 있다. 중앙 광장의 양편에 의사당과 법원청사가 마주하고 있고 북쪽에는 주지사 관저가 계획되었다. 의사당 뒤편에는 주정부청사가 있는데 이 건축들에는 코르뷔지에 건축의 모든 것이 다 실현되어 있다. 빛은 그의 손을 빌려 황홀한 음악이 되어 건축의 내부에 침윤되고 공간은 마치 장대한 서사시처럼 전개된다. 콘크리트의 면은 때로는 거친 바위처럼, 때로는 부드러운 물결처럼 우리의 감성을 건드리며, 디테일과 색채는 공예요, 회화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성취가 코르뷔지에 건축의 완성일 뿐 인도의 특성이 없다는 이유로 그는 비판받았다. 나 자신도 책으로 이 도시를 공부했을 때 그런 의견에 동의하였다. 말년에 코르뷔지에가 보인 일에 대한 집착과 과욕을 상기하면 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 도시의 그 장소에 섰을 때, 그것은 단연코 오해며 잘못된 견해임을 나는 알게 된 것이다.

바로 의사당과 법원청사를 양편에 둔 폭 440m 광장의 한 복판에서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크기였으니, 그가 곧잘 인용했던 아크로폴리스의 광장이나 근대 도시계획의 중심광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스케일이었다. 부재(不在)의 공간이며 왜곡된 소외의 광장이다.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이런 광장을 왜 이 도시의 가장 중심적 위치에 두었을까.

시대의 거장 코르뷔지에는 이미 그 시대의 중심사조이던 모더니즘을 뛰어 넘고 있었다. 어떤 규칙이나 범례도 따르지 않던 그는 생애 마지막에 어떤 이념에서도 자유로운 도시를 건설할 것을 꿈꾸고 있었을 것이다. 자유의 도시. 그는 그 근거를 인도의 풍경에서 찾게 된다. 그가 그린 수많은 인도의 태양과 토템의 스케치들이 이를 증명하며 아마도 바라나시의 수수께끼 같은 풍경이 그가 그린 이상 도시의 바탕이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통상적인 건축의 문법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그 광대한 광장을 그렸을 것이다.

그렇다. 바라나시를 보고 난 후, 나는 코르뷔지에가 만든 그 부재의 광장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저 멀리 히말라야 산맥의 실루엣이 보이고 태양이 마구 내리쪼이는 이 황량한 들판에 그는 새로운 아크로폴리스를 세운 것이다. 찬디가르의 중심 광장 뒤편에는 그가 만든 '열린 손(Open Hand)'이라는 상징물이 있다. 이 조형물을 두고 그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찬디가르에서 솟은 이 손은 평화와 화해의 표시다. 창조적 풍요함을 받으며 또한 이를 세계인에 건네는 이 손은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다."

그런 그가 만든 이 찬디가르는 근대의 한갓 신도시가 아니라 역사를 초월한 의식에 바쳐진 태양의 도시며 인도의 땅에 새긴 신화였다.

승효상 <건축사무소 '이로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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