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이십세기폭스사의 황당한 주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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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할리우드 스타 키아누 리브스(44)가 17일 개봉한 영화 ‘스트리트 킹’의 홍보를 위해 한국을 찾았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그는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같은 한국말로 친근감을 드러냈지만 앞서의 상황은 이와 달랐다.

이 영화의 배급사인 이십세기폭스코리아(이하 폭스)는 지난주 일부 언론을 대상으로 시사회를 열면서 황당한 주문을 했다. 영화에 나오는 한국인 관련 내용을 기사화하지 말라는 요구와 함께 이에 동의한다는 서명까지 받았다. 16일 열린 시사회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반복됐다. 기자들에게 회견용 질문을 미리 보내 달라고 주문했다. 한국 관련 내용은 질문으로 채택되지 않을 것이라는 뉘앙스와 함께였다.

폭스가 염려한 장면은 영화 초반에 나온다. 주인공 형사(키아누 리브스)는 한국계 갱단에 접근해 인종적인 모욕을 퍼붓고, 이들을 혼자 습격해 잔혹하게 해치운다. 과잉살상은 경찰들의 공모로 감춰지고, 형사는 현장에 감금돼 있던 소녀들을 구출한 영웅으로 포장된다. 그리고 영화는 경찰 내부의 암투와 음모를 그려내기 시작한다.

이 영화가 폭스의 짐작처럼 지금 한국사회에서 ‘오해로 인한 부정적 시각 및 이슈 발생의 우려’가 얼마나 큰지 의문스럽다. 한국인이 인신매매단으로 등장한 영화 ‘크래쉬’(2006년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도 개봉했거니와, 그렇게까지 걱정이 컸다면 이 영화의 한국 개봉을 결정한 이유가 궁금해진다. 시사회 다음 날이면 일반에게 공개될 영화를 두고 보도 방향을 미리 정하려는 폭스의 마케팅은 관객을 우롱하는 처사에 가깝다.

정작 기자회견장에서 관련 질문을 던지자 키아누 리브스는 유연하게 답했다. 그는 “한국 관객이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며 “주인공이 갱들을 자극해 폭력을 유도하는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주최 측은 인종차별로 들릴 수 있는 또 다른 대사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자 “이런 내용은 여기까지만 질문을 받겠다”고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기도 했다.

할리우드가 한국에 직배로 진출하기 시작한 때는 1988년. 꼭 20년 전이다. 그만한 이력이라면 일방통행식 주문으로 관객의 반응을 통제하려는 시도 대신 한국시장을 제대로 파악하는 수완을 보여 줘야 할 것 같다.

이후남 문화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