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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제2부 불타는 땅 운명의 발소리(21) 지상이 술잔을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장사꾼이라는 게 무섭군,이 판에도 술장사를 하다니.어이가 없어.』 『뭐가? 옆에 앉힐 여자가 없어서?』 『지금이 어느 땐데…참 놀라겠구나.』 『남자 무서워 시집 못 갈까.놀랄 거 없어.그냥 마시고 오늘 하루 놀면 돼.』 지상이 고개를 저었다. 『놀랄 게 하나 둘이 아니군.이런 집이 있다는 것도 그렇고어떻게 이 판에 술마셔도 되는 건지 그것도 모르겠고,더 놀라운건 너다.이런 재주도 다 있는 줄은 몰랐거든.』 들어서면서부터그런 생각을 했었다.어떻게 이런 곳이 있었던가 싶었다.지금은 전시가 아닌가.그것도 일억옥쇄에 본토항전이다.일본인이 다 죽는한이 있더라도,나라 밖의 전장에서 전부 패퇴하더라도 본토를 지키면서 다 함께 죽어가자는 때가 아닌가.
공습이 계속되고,어제는 저기서 오늘은 어디가,불바다가 되었다는 소식들이 들려오지 않는가.어디 그뿐인가.아이들은 시골로 전부 보내지고 있다고 했다.조선놈이라면서 나한테 돌을 던지던 그아이들도 지금 어딘가로 이 전화를 피해서 보내졌 을 것이다.미치코가 나를 찾아올 수 있었던 것도 공습과 아이들의 소개 때문이었다.그런데 한쪽에서는 버젓이 이런 술장사를 하는 곳이 있다는 게 지상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역시 장사꾼들이란 다르구나 싶었다.
네모진 탁자를 마주하고 앉은 길남이 지상에게 잔을 건네면서 옆에 앉힌 일본여자의 어깨에 팔을 얹으며 말했다.
『젠장.호박꽃도 꽃은 꽃이지.』 별로 술을 마셔본 적도 없었던 지상은 건너오는 술잔을 받아 얼굴을 찡그리며 마셨다.모르겠다.모두가 다 미쳐가는 세상이다.마셔서 잊혀진다면 못 마실 것도 없지 않은가.
얼굴을 찡그리는 지상의 모습을 보며 웃고 있던 길남이 자신의잔에 술을 따르는 여자를 보면서 손을 내저었다.
『다 좋은데 나는 이 첨잔하는 게 싫단 말야.이거야 조선사람이 볼 땐 죽은 사람에게나 하는 거 아냐!』 길남이 옆을 지나가는 다른 여자를 불러세우며 말했다.
『이봐.여기 커다란 잔 하나 줄 수 없어.그냥 사발같은 걸로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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