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인문학 위기, 소통이 돌파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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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올해 입시에서 상위권 대학들의 철학과 또는 철학과가 속한 인문학부의 인기가 높아졌다고 한다. 서울대(3.97 대 1→4.92 대 1 ), 고려대(3.11 대 1→3.81 대 1), 성균관대(2.94 대 1→3.94 대 1), 한양대(5.23 대 1→9.47 대 1) 등의 입학 경쟁률이 지난해보다 크게 상승한 것이다. 대학 관계자들은 이 현상이 내년 3월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개교와 무관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로스쿨 개교와 함께 법대는 사라지게 되는데, 이 경우 철학을 전공하는 것이 졸업 후 로스쿨 진학에 유리할 거라고 생각하는 학생이 많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철학의 부활’ 움직임이 감지된다고 호들갑이다. 반가운 일이긴 하지만, 인문학이 얼마나 피폐해 보였으면 이만한 일로 ‘철학의 부활’이란 말까지 나오나 싶다. ‘부활’이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이다. ‘르네상스’란 말도 고대 그리스·로마의 황금시대가 중세 천년의 죽음을 거쳐 다시 살아났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런데 과연 우리 철학이 ‘황금시대’를 누려본 적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인문학 위기’란 말도 그렇다. ‘위기’란 잘나가다가 추락할 때 흔히 쓰는 말이다. 예컨대 서양에서는 1세기 전만 해도 역사책을 찾는 엄청난 독자층이 있었으며 그 규모가 때로는 대중소설 독자층을 능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상당수의 역사학자들은 다른 역사학자들을 위해서만 글(논문)을 쓰고 있고, 비전문가에게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언어는 일반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 이 경우 한때 전성기를 누리다 추락했으니 인문학 위기란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나라 인문학에는 그런 전성기가 없었다. 1세기 전의 인문학을 거론조차 할 수 없다. 일본어를 국어로 상용(常用)하다가 한글을 본격적으로 쓴 지 이제 겨우 반세기를 조금 넘겼으니 말이다. 게다가 19세기 이전까지의 공용 문자인 한문으로 기록된 문헌 가운데 이제 30%만이 한글로 번역되었다고 한다(번역의 질은 논외로 하자).

그러므로 모국어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인문학이란 관점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신생독립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역사의 이러한 특수성을 감안하면, 우리에게는 ‘인문학 위기’보다는 오히려 ‘인문학 고사(枯死)’가 잘 어울리는 표현으로 보인다. 떡잎 단계부터 영양실조 상태로 비틀거리며 오늘에 이르렀다는 뜻에서 말이다.

부산대 강명관(한문학) 교수는 지난 한 해 동안 네 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16년간의 연구 결과물을 한꺼번에 풀어낸 것이다. 인문학 교수 중 변변한 저서 한 권 못 내고 학자 생활(?)을 마감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우리 현실에 비춰 보면 대단한 성과다. 특히 그의 저서들은 대중성까지 겸비하고 있어서 수만 명의 독자층을 거느리고 있다. 그런데 강 교수는 “저서를 몇 권씩 내도 학교 당국은 (학술진흥재단) 등재 학술지나 등재후보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이 아니라는 이유로 연구점수를 0점으로 처리한다”고 개탄한다.

의학과 달리 인문학은 고객에게 직접 서비스를 파는 대신 대학의 관료주의적 구조에 의존해 생존을 영위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인위적 보호장치 안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驅逐)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더 많은 사람에게 소용되는 더 많은 지식을 생산하고 기존의 지식을 새로운 방법으로 보급할 수 있는 역량이다.

커트 스펠마이어는 『인문학의 즐거움』에서 인문학의 목적이 전문지식과 일상적 삶의 세계를 연결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소통’이 인문학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과의 소통을 오히려 적극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 인문학의 자폐적 상황은 자못 비관적이다. 요즘 그나마 ‘철학의 부활’을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인문학이 법학과 ‘소통’한 덕분이었는데 말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소통으로 돌파해야 한다.

박상익 우석대 교수·역사교육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