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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tyle] “영국 신사 패션엔 유머가 있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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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폴 스미스가 지난해 봄, 여름용으로 런던에서 발표했던 남성복 패션쇼 모습. 줄무늬 바탕에 꽃무늬가 새겨진 프린트 셔츠, 붉은색 바지 등이 폴 스미스 패션의 ‘유머’를 담고 있다. 그의 남성용 수트는 재킷 허리선이 살짝 들어간 정통 영국식 실루엣이 큰 특징이다. 재킷의 어깨 부분도 보디라인에 꼭 맞게해 영국 수트의 느낌이 난다. 수트용 바지에는 체크 무늬를 넣어 밋밋하지 않게 디자인했다. [사진=폴 스미스]

“어? 시간이 별로 없네요. 제가 바빠서 이만.”

인터뷰를 하려고 이제 막 자리에 앉아 ‘처음 한국에 온 소감이 어떤가’를 물었고 “어젯밤 도착해서 많이는 못 봤지만 거리에서 본 젊은이들 옷차림이 꽤나 감각 있어 보였다”는 짧은 답만 들은 뒤였다. ‘한 시간 동안 인터뷰하기로 해 놓고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다. “농담이에요.하하.” 그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5살 꼬마처럼 순진하게 웃으면서 말이다. 만난 지 채 몇 분도 되지 않은 기자에게 넉살좋게 우스개를 했다고 해서 그를 만만하게 보면 오산이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아(2001년) 이름 뒤에 ‘경(卿)’자를 붙여 공손하게 칭해야 할 사람, 바로 영국을 대표하는 패션 디자이너 폴 스미스(61·사진)다.

#유쾌한 스미스 경

14일 오전, 서울 신사동 폴 스미스 매장 앞에 검은색 차가 나타났다. 폴 스미스는 씩씩하게 문을 열고 내렸다. 그는 기다리고 있던 한국인 직원들과 밝게 인사를 나눴다. 이내 재킷 호주머니에서 디지털 카메라를 꺼내 들고는 모두에게 포즈를 취해 달라고 말했다. 셔터를 심심하게 누른 뒤 그가 외쳤다. “하나, 둘, 셋, 할 테니까 셋에 다같이 손을 흔들어 주세요.” ‘회장님’의 격의 없는 말씀에 직원들 모두 표정이 환해졌다. 성격 까다롭고 독특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패션 디자이너이면서 스스로의 이름을 딴 세계적인 패션회사 대표이기도 한 그의 모습은 정말 소탈하고 유쾌했다.

소년 시절 사이클 선수로도 활동했던 그는 큰 부상을 입고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17세 때. 패션 디자인을 전공하던 여자친구(지금은 결혼해 부인이 됐다)를 만나 패션에 눈을 떴다.

“자투리 천을 떼다가 디자인을 시작했어요. 정통 영국 수트를 디자인하는데 자투리 천으로 하려니까 (남아서) 살 수 있는 건 줄무늬 천밖에 없더라고요.”

1970년 시작해 이제는 ‘폴 스미스’의 로고처럼 쓰이는 줄무늬에 얽힌 사연은 이랬다. 줄무늬는 폴 스미스 로고에도 적용돼 있고 수트 재킷 안감이나 셔츠에도 마찬가지로 쓰일 정도로 그가 애용하는 것이다. 자투리 천만 쓸 만큼 작은 규모로 시작한 그의 ‘옷 가게’는 이제 전 세계 200여 개 매장을 갖춘 명품이 됐다. 영국 패션을 전 세계에 알린 공로로 기사 작위도 받았다.

“작위를 받고 나서 뭐 달라진 것 없느냐”고 묻자 “전혀”라고 대답한 그는 “신용카드에 쓰여 있는 것도 아니고 뭐 별로 나타낼 일이 없어요”라며 웃었다. 그는 “젠체하는 게 싫다”고 했다. “영국 패션이 프랑스나 이탈리아와 다른 것은 바로 이것”이라고 했다.

“분명히 그들(프랑스·이탈리아)의 패션은 환상적입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저 예측 가능한 정도예요. 그러면서도 디자이너들은 너무 콧대가 높죠. 하지만 난 그게 별로예요. 영국 패션은 현실적이고 거기에 유머 감각을 넣습니다. 난 그게 좋아요.”

그는 정말 유머 감각이 뛰어났다. 인터뷰가 진행된 한 시간 남짓 동안 대화에 집중하면서도 끊임없이 장난을 쳤다.

#‘옷이 당신을 입는 것’이 아니다

“패션에서 위트, 유머 감각이 왜 중요한가” 물었다. “영국인의 위트는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향해 ‘뚱뚱하다’ ‘못 생겼다’하고 놀리는 것이 아니에요. 미스터 빈 보세요. 자기가 바보가 되는 거죠. 그런게 유머고 그게 내 디자인의 철학입니다.”

이렇게 설명한 그는 재킷 안감을 들어 보였다. “겉은 정통 수트지만 안감은 밝고 환한, 형형색색 줄무늬로 돼 있죠. 그리고 양말은 그것에 맞춰서 신으면 정말 멋있습니다. 영국적인 유머 감각, 나만의 패션 철학이란 이렇게 ‘숨겨진 비밀’에 있답니다.”

남을 깎아내리면서 웃기기보단 스스로 바보가 되어 남을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그의 웃음 철학을 듣고 나니 그가 디자인한 수트가 절로 이해됐다. 점잖게 차려입으면서도 나만 아는 개성을 표출하는 방법이 멋쟁이의 지름길이란 얘기로 들렸다.

하지만 조금 더 구체적인 조언을 듣고 싶었다. 대놓고 ‘어떻게 하면 옷을 잘 입을 수 있는지’를 묻자 그가 장황하게 설명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카페에 갑니다. 손님은 나밖에 없습니다. 커피를 시키죠. 그때 카페 안에는 바닥을 청소하는 아저씨 한 명만 눈에 띕니다. 대부분은 그가 청소하는 사람처럼 입었다고, 별로 대단하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아는 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말을 겁니다. 그도 내가 누군지 모르고요. 나는 그를 볼 때 그가 어떤 옷을 입었기 때문에 어떻다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 역시 마찬가지죠. 옷을 입을 때 명심할 것은 ‘당신이 옷을 입는 것’이지‘옷이 당신을 입는 것은 아니다’라는 겁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지 ‘프라다 누구’ ‘샤넬 누구’는 아니지 않습니까. 옷을 잘 입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가지는 것 말곤 없습니다.”

설명은 길었지만 메시지는 간단했다. 40여년 패션에서 일가를 이룬 대가는 명확하게 답했다. “패션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라고. 

글=강승민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폴 스미스=1946년 노팅엄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아내인 폴린과 함께 23세 때 고향인 노팅엄에서 처음 작은 옷 가게를 열었다. 영국 왕립미술대학(RCA)에서 패션을 전공한 아내의 도움으로 패션계에 입문한 그는 76년 프랑스 파리에서 남성복 패션쇼를 처음 열면서 이름을 알렸다. 그의 이름을 딴 패션회사는 현재 정통 클래식 수트를 비롯해 청바지 등 캐주얼 라인, 향수, 시계, 가구 등 ‘폴 스미스’이름이 붙은 12개 컬렉션을 발표하는 큰 규모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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