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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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한 물살이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새 물결이 그 위로 겹쳐서닥칩니다.바닷가에 서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가는 소리와 오는소리를 언제나 함께 듣게 되지요.…세상 일도 다 그런 것같습니다.』 나선생은 아리영의 「상처」를 짐작하는 눈치였다.그것이 어떤 상처인지 알지 못하는대로 「다가오는 새 일」이 있음을 위로삼아 일러주려는가.일곱살 손위인데도 그는 아리영보다 한창 어른스러워 따뜻한 아버지같다.
두시간 반 후,배는 마라도를 떠나 제주도를 향했다.
둘레 4.2㎞.한시간이면 돌 수 있는 그 작은 섬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그러나 길이 25밖에 되지 않는다는 분교의 작은 운동장이 아리영 눈에 내내 밟혔다.힘껏 공을 차면 바다로 떨어질 그런 운동장에서 혼자 놀고 자랄 여자아이 모습도 삼삼했다. -서울에 가면 좋은 동화책이랑 사서 보내리라.
집에 돌아와보니 아버지가 있었다.반갑고도 놀라웠다.
『아버지! 웬일이셔요?』 『웬일이라니? 젖엄마도 오랜만에 뵐겸,너도 데리러 올 겸,겸사겸사 왔지.』 『저는 당분간 안 갈텐데요.』 피곤한 기색의 아버지를 보니 가슴이 찡했으나 강한 말투로 응했다.
『모레가 최교수 49재날이라는구나.이서방은 일 때문에 가지 못할 모양이니 너라도 참석해야 하지 않겠어?』 아버지는 남편과그녀의 일을 알고 있을까.새삼 괴롭고 민망했다.
『어디서 재 지낸대요?』 『서울 변두리의 작은 절에서 올린단다.』 -하는 수 없지,갈 수밖에.하지만 남편은 만나지 않을 것이다.사건이 빚어진 발단은 어떻든 아리영에게 있으나 남편 얼굴은 보고싶지 않았다.
아리영이 떠난다니까 쌍둥이 형제는 초주검이 됐다.아리영의 구두를 한짝씩 들고 등뒤에 감추고 서 있다.
『요녀석들 보게! 얼른 내드리지 못해?』 서귀포댁의 호통에 눈물을 글썽이며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는다.구두에서 빤짝빤짝 윤이 났다.그새 한짝씩 공들여 닦은 듯했다.
콧등이 시큰했다.아리영은 형제를 껴안고 눈물지었다.
『가을 연휴에 서울로 초대할게.어린이대공원에도 가고 박물관에도 가자!』 두 아이는 찔끔거리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튿날 아침 일찌감치 나선생이 제주공항까지 배웅해주었다.한라산이 보이는 길로 달렸다.
아름다운 산이다.섬 한가운데 안온히 치솟아 앉아 넓게 치맛자락을 편 지체높은 여인과 같은 산.숱한 수목으로 덮인 깊은 계곡과 얼얼한 분화구(噴火口)를 지닌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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