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테러범 감춘 스페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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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권하 베를린 특파원

스페인 마드리드 기차역에서 지난 11일 연쇄 폭발 사고가 발생해 200명이 몰사하고 1600여명이 부상했다. 사건 직후 스페인 당국은 테러에 사용된 폭발물이 국내 바스크 분리 독립 무장단체인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가 사용했던 '티타딘'이라고 발표했다. 폭발물의 종류는 테러 배후를 밝혀내는 가장 중요한 단서다. 미국.유럽 등 각국 정부와 언론은 테러가 ETA와 관련이 있다고 믿게 됐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사건 당일 ETA를 비난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ETA는 국제사회의 동네북이 됐다.

그러나 스페인 정부는 조금씩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총선 전날인 13일엔 폭발물이 '티타딘'이 아닌 다른 물질이지만 이 역시 ETA가 사용해오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체포된 3명의 모로코인 테러 용의자는 이슬람 테러리스트들과의 연계를 확인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총선이 끝나자 스페인 정부는 말을 완전히 뒤집었다. 테러에 사용된 폭발 물질은 ETA가 과거에 사용한 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반면 알카에다가 테러에 개입한 증거가 속속 드러났다. 14일 오후 테러 현장에서는 "스페인의 이라크 파병에 대한 보복으로 테러를 저질렀다"는 알카에다의 주장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때부터 나라 안팎이 들끓기 시작했다. 정부가 총선 승리를 위해 테러의 배후 세력이 알카에다가 아닌 것처럼 몰아가려 했다는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스페인 국영 EFE 통신사 기자들은 편집 최고 책임자의 사임을 요구하고 나섰다. 정부의 주장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한 것을 반성하라는 취지다. 독일의 제1공영 방송 ARD는 스페인 정부가 사실을 호도하기 위해 그릇된 정보를 인접국에 통보한 사실을 공개적으로 문제삼았다. 유럽의 각국 정부가 내심 불쾌해하고 있다는 얘기다.

결국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총리가 이끄는 국민당(PP) 정부는 무난히 재집권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참패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했던 집권당의 안이한 대응에 스페인 유권자가 표로써 본때를 보인 셈이다.

유권하 베를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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