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개전 1주년] 上. 헝크러진 중동 질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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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지난해 3월 20일 시작된 이라크전은 3주 만에 싱겁게 끝났지만 아직도 저항세력의 폭탄공격은 연일 벌어지고 있다. 미국은 이처럼 전후처리에 뜻대로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고 있다. 더구나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발생한 대규모 폭발 사고로 참전국 동맹의 축에 균열이 가는 타격을 입었다. 반면 미국의 힘을 실감한 중동 각국의 집권세력들은 활로를 모색하느라 부산하다. 이라크는 지금 어디에 있으며 중동과 세계의 질서는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점검했다.

"이라크 전쟁은 중동지역에 발생할 대지각 변동의 시작일 뿐이다." 지난해 3월 20일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자 중동의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했던 경고다. 이라크 전쟁은 9.11 테러 이후 전개된 미국의 대중동 강경책의 정점이었다. 아랍의 각국 정부는 지난 1년간 중동에서 벌어진 각종 변화를 헤쳐가며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 왔다.

◇지각 변동 진행 중=미국의 '예방적 선제 공격(preemptive strike)'의 실례인 이라크 전쟁을 옆에서 지켜본 중동 국가들은 혼비백산하는 심경을 숨기지 않고 있다. 따라서 전쟁 이후 지난 1년간 중동권의 정치질서는 급변했고 아직도 '진행 중'이다.

우선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을 지원했던 걸프해 연안 왕국들의 위상이 높아졌다. 구체적으로 말해 걸프지역 미군 사령부가 위치한 카타르와 미 해군 5함대 사령부가 있는 바레인의 정치적 위상이 올라갔다. 미국을 등에 업은 이 작은 왕국들은 최근 아랍연맹의 개혁을 요구하며 아랍권에서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

반면 미국의 중동 내 전통적인 우방이었던 사우디아라비아가 테러 지원국 명단에 오를 위기에 처해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막강한 '오일머니'로 중동 빈국들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 오던 사우디아라비아 왕족은 미군이 사령부를 카타르로 옮긴 이후 중동의 중심국 역할은커녕 내부의 반정부 테러에 골치를 앓고 있다.

중동 강경파 정권들은 변신을 위해 부산하게 움직였다. 리비아는 지난해 12월 대량살상무기(WMD) 포기 선언에 이어 핵사찰에 적극 협조하고 나섰다. '아랍의 적'인 이스라엘과도 관계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테러지원국으로 분류된 예멘과 수단도 최근 이미지 개선에 노력 중이다. 예멘은 미국의 대테러 전초기지 역할을 자처하며 미국에 협조할 것을 선언했고 수단은 남부 기독교 반군과의 평화 협상을 추진하며 미국의 중재를 요청하고 있다.

중동 내 각국간 이합집산도 진행됐다. 반미 진영 국가들이 '과거의 적'들인 친미 국가들에 화해의 손길을 내밀며 잰걸음을 하고 있다. '악의 축' 이란과 시리아는 이집트.터키 등 친미적 주변 강국들과 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있다. 미국의 군사적 위협과 경제제재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다.

◇내.외부의 개혁 요구=일부 전문가가 예견했던 중동 독재정권들의 '도미노식 붕괴'는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개혁에 대한 내.외부에서의 압력이 점차 거세져 중동 각국의 집권 세력들은 불안하기만 하다.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이라는 무력 보복에 이어 미국이 최근 추진하고 있는 '대중동(Greater Middle East)' 민주화 구상이 대표적인 예다. 이에 대해 아랍권은 '미국에 의한 총 없는 전쟁'이라며 반발하고 있지만 개혁의 물결을 무작정 거부할 수도 없다.

왕족 독재국가 사우디아라비아는 사상 최초로 지방선거를 실시하고 인권기구를 설립하겠다고 발표했다. 요르단.쿠웨이트는 테러 세력의 양성을 막겠다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슬람교육 개혁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대부분 중동의 정권들은 외부로부터의 개혁 대신 내부로부터의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겠다며 미국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각 정권은 내부의 '불만'에도 불안해하고 있다. 이라크 전후 중동에서는 미국의 점령, 팔레스타인 문제, 프랑스의 히잡 착용 금지 결정 등 여러 사안과 관련, 대규모 정치집회가 급증했다. 중동지역에서 이 같은 정치집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경찰이 실탄을 발포하면서 시위를 진압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반미.반점령의 구호가 반정부로 점차 바뀌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동의 정권들은 강경 진압은커녕 언론과 대국민 연설을 통해 국민 감정을 달래기에 여념이 없다.

카이로=서정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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