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비자금>5.왜 돈에 집착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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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노태우(盧泰愚)前대통령은 취임 첫해에는 돈을 별로 쓰지 않았다.전임 전두환(全斗煥)대통령과는 좀 다른 모습을 보이려 했기때문이다.5共의 정치자금이 한창 말썽을 빚고 있는 때이기도 했다.그래서 盧대통령은 첫번째 맞은 추석에도 당시 에는 관례처럼돼 있던 촌지를 돌리지 않았다.극소수의 사람들만 떡값을 받았을뿐이다.추석때면 으레 의원들에게도 몇백만원씩 돈을 돌린다.5共때 주요 당직자들은 수억원씩 받기도 했다.
야당의원들도 적지않게 끼어있다.비단 의원들 뿐만이 아니다.지근 인사들에게도 두둑한 봉투를 들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그래서 때가 되면 그들은 습관처럼 봉투를 기다린다.그러나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盧대통령의 떡값이 없자 그것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실망은 컸다.특히 정치권의 불만은 대단했다.
그렇다고 돈을 안주었다고 내놓고 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당연히 정치를 엉망으로 한다느니 하는 식으로 盧대통령을 비난하는목소리가 높아졌다.결국 盧대통령도 이듬해부터는 제대로 된 봉투를 돌리기 시작했다.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권력은 엄청나다.그러나 그 권력의 관리를 위해서는 돈이 든다.권력으로 돈을 모으고 그 돈으로 권력을 관리한다.
정통성이 없는 정권일수록 돈에 대한 의존도가 더 높았다.
돈 없이는 기름 안친 기계처럼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아무리거대한 조직이라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권력자들이 돈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전두환(全斗煥)前대통령 측근중에 L씨가 있다.5共에서 장관급자리와 청와대 수석을 지낸 인물이다.
5共당시 그는 全대통령의 측근이랄 수 없었다.오히려 퇴임 이후 측근이 됐다.그는 퇴임 이후 全씨 일가의 측근임을 자임했다.알짜 측근들이 슬슬 피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렇게 된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언젠가 그가 직접 한 말이다.全대통령은 퇴임 직전 마지막 청와대 수석회의를 주재했다.그 자리에서 全대통령은 수석비서관들에게 이른바 전별금이란 것을 돌렸다.봉투 속에는 5천만원이 들어있었다고 한 다.
수석회의를 마친 全대통령은 수석들을 한사람씩 따로 불렀다.L수석도 당연히 불려갔다.全대통령은 L수석에게 봉투를 하나 주었다.사무실을 차리는 비용으로 쓰라는 것이었다.全대통령은 『부인한테 맡겨두라』는 얘기도 했다고 한다.L수석은 방 문을 닫고 나오면서 한 3천만원 들어있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이미5천만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봉투를 열어보니 동그라미가 하나 더 있었다.3억원이었다.L수석은 대통령이 자신을 이토록 챙기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지금까지도 그는 全前대통령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某정당의 원내총무도 비슷한 경험을 한적이 있다고 한다.추석때였다.추석이 다가오면 대통령은 여야 총무를 포함한 3役등을청와대로 부른다.정기국회 대책도 있고 해 겸사겸사 부르는 것이다.그 역시 봉투를 받았다.궁금한 마음에 돌아오는 차안에서 봉투를 열었다.생각보다 동그라미가 하나 더있는 3억원이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그는 운전사 몰래 동그라미 숫자를 세고 또 셌다고 한다.
그해 정기국회는 큰 탈없이 넘어간 것으로 되어있다.
5共때의 경찰 위세는 대단했다.검찰을 능가한다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였다.그도 그럴 것이 全대통령은 툭하면 치안본부장을 청와대로 불렀다.그리고는 수고한다며 억대의 격려금을 지급했다.기본이 1억원이었다고 한다.그 격려금은 아래로 내려 간다.경찰의사기가 등등해질 수밖에 없었다.
충성확보를 돈으로 한 것이다.야당지도자들이 한달에 수억원을 쓸 정도니 대통령의 통치자금은 가위 짐작이 간다.
그러나 드러난 대통령의 수입은 너무 제한돼 있다.청와대 예산은 기백억원이다.다 해봐야 대통령이 지급하는 집권여당 운영비 서너달치밖에 안되는 규모다.안기부 예산의 일부를 쓰기도 한다고하지만 그것으로도 턱없이 부족하다.다 합쳐봐야 코끼리 비스킷 격이다.그러니 돈 있는 사람한테 손을 내밀 수밖에 없다.
***“욕심내면 치어죽을정도” 또 손만 내밀면 들어오니 관성이 붙게 된다.全前대통령은 『대통령이 돈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돈에 치어 죽는다』는 말까지 남겼다.
대통령의 입장에선 퇴임 이후도 생각해야 한다.정통성 없는 정권의 대통령일수록 더욱 그렇다.그러다보니 자기보호의 수단이 필요하다.가장 원초적인 보호수단은 역시 돈이다.전직대통령 가.차명계좌 존재의 개연성은 그래서 꼬리를 물고 사그라 들지 않는 것이다. 대통령선거를 앞둔 6共말기의 일이다.故 정일권(丁一權)前총리가 민자당 선거대책본부 고문으로 임명된 뒤 全前대통령을찾아갔다고 한다.그 자리에서 全前대통령은 丁前총리에게 농담삼아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내계산으로는 盧대통령 수중에 5천억원은 있을 것같으니 민자당이 반만 달라고 해서 선거를 치러 보시오.』물론 우스갯소리처럼 한 말이었다.
그러나 나름의 계산법이 있었을 법하다는 얘기도 있다.권력과 돈은 묘한 함수관계를 지니고 있다.권력은 아낄수록 힘이 나지만돈은 쓸수록 힘이 난다는 얘기도 있다.그렇기 때문에 권력자에게돈은 정말이지 필요악이다.
〈李年弘기자〉 〈다음회는 「비자금 관리 어떻게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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