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비자금>3.財界서얼마나 주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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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전직 대통령이 4천억원 정도의 비자금을 모아 갖고 있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H그룹 모회장은 8일 서슴없이이렇게 말문을 열었다.『그 금액은 서민들에겐 천문학적 숫자지만舊정권 관계자의 입장에서 보면 큰 의미를 둘 게 못 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그의 설명은 간단하다.92년 정주영(鄭周永)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폭로한 제공 비자금 내용을 보면 답이 나온다는 얘기다.
鄭명예회장의 말대로라면 잘 알려지다시피 한번에 1백억원을 헌납했다. 상위 40대 기업에서 이런 행태를 수년간 되풀이 했다면 쓰고도 남은 돈이 이 정도는 되리라는 해석이다.
10대그룹에 드는 또다른 한 회장은 『지금까지의 예에 비춰 통치자들은 퇴직후 자기관리를 위해 정권말기에 큰건을 허가해주고거금을 챙겼다』며『설로 나돌고 있는 비자금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의견을 같이 했다.
그는 『재계로서야 정치권이 돈을 요구하면 줄 수밖에 없는 일이다.양정모회장의 국제그룹 붕괴가 보여주듯 통치권자와의 관계악화는 곧 몰락의 서막이다.어떤 형태로든 손해를 보게 마련이며 지내기도 불편하다』고 털어놨다.
그렇다면 5,6共시절 재계는 얼마만한 정치비자금을 조성해 고위정치권에 주었을까.정확한 계산은 불가능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자금의 수수(授受)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은밀하게 이뤄지고 그후에도 일체 비밀에 부쳐지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이다.
반대급부가 깨졌을 때 가끔 폭로되거나 당국의 수사에 의해 일부 드러나기는 하나 이는 빙산의 일각일 수밖에 없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한 고위임원은 때문에 이렇게 추산할 수밖에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과거 대선 때는 1조원 정도의 선거자금이 풀려나간 때도 있었다.비자금의 대부분은 기업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그는 또『대선의 경우 상위 몇개 그룹에서는 적게는 5백억원,많게는 7백억원 정도를 냈을 것』이라고 말했다.
鄭명예회장이 한꺼번에 1백억원을 최고 통치권자에게 건넸다고 폭로했으나 각 그룹이 선거때면 이 정도만 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각 계열사는 그룹과 별도로 돈을 쓴다.
각사의 사정이나 필요에 따라 특별한 관계를 맺고 관리하는 정치인이 몇명씩은 있기 때문이다.
대선 때는 당연히 각 지역구 위원장들이 뛰게 되고 이들이 자체조달하는 활동비 역시 주변기업들의 몫이다.
그룹의 20~30개 계열사가 20억원씩을 지원한다고 보면 이돈만도 4백억~6백억원이라는 그의 설명이다.
전경련의 또다른 관계자는 『부담이 이쯤돼서인지 선거 무렵이면회장단 주변에서 돈만 내고 구경만 할게 아니라 그 돈으로 재계대표를 내는게 좋지않느냐는 진반농반의 말들이 오고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鄭명예회장이나 대우 김우중(金宇中)회장이 한때 정치에 뜻을 두게 된 이면에는 이같은 자금부담에 대한 면밀한 계산도 깔려 있었을 것이라는 전경련 관계자의 말이다.
최근 한 재벌그룹 회장이 실명제가 기업운영에 부담이 되지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대기업은 97~98%가 공개돼 있다.2~3%만 공개되지 않았고 이를 재량으로 운영하고 있을 뿐이다.』 대기업그룹측이 실명제를 찬성하고 이의 완화를 반대함으로써 권력자들에 대한 거액헌납 거절구실을 찾고있다는 의미도 된다.
H그룹 L전무는 『5,6共시절 통치권자에 대한 평소 헌납은 국가의 주요 투자계획이 발표되거나 광복절 기념행사 등때 청와대등 권력핵심이나 대통령의인척들을 통해 이뤄졌다』고 밝힌다.
전두환(全斗煥)前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이른바 큰 행사(술 대접)와 작은행사(식사)를 갖고 재벌회장들을 몇명씩 직접 불러 5천만원권 수표로 10억원단위로 받은 것으로 재계에 알려져 있다. 자리에서 부르는 순서도 봉투의 두께에 따라 달랐다는 전언이다. 노태우(盧泰愚)前대통령은 주로 금융계의 황제로 소문난 L씨와 전직장관 K.L씨등 측근들을 대리인으로 내세웠다고 그는 말한다. ***주로 친인척이 맡아 기업총수나 비자금 관리자들을청와대로 초청해 투자계획 설명회 등을 개최하면 전후를 살펴 참여 가능한 사업규모에 따라 돈을 주고 나왔다는 말도 있다.상위그룹은 10억원대,중견그룹들은 수억원을 의례적으로 냈다.
사회간접자본등 굵직굵직한 건을 설명하는 때면 이보다 더많은 돈을 쾌척하고 후사를 도모하기도 했다는 것이 재계의 설명이다.
눈치있는 총수들은 대통령이나 부인의 생일을 기회로 활용했다고한다. 총수들이 직접 방문하거나 또는 축하사절을 보내 선물대로억대를 내고 개인 친분을 돈독히 하고 지명도를 높였다는 것이다. 재벌들이 비자금을 모아서 바치는 일은 흔치않다고 전경련측은밝힌다. 그로 인한 반사이익이 적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한때 모아 내는적도 한두번 있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는 비자금의 조성이나 제공으로 볼 수 없다고 해석한다.
현정부 들어서는 대통령의 요청은 없는 것이 사실이라고 재계 관계자는 말한다.
정부는 올초 전경련에 광복 50주년 기념사업비의 갹출을 요청했다 부작용을 우려해선지 한달뒤 스스로 이를 취소하고 정부자금으로 행사를 치르기로 했다고 전경련 고위임원은 전했다.
그렇다고 문민정부 아래에서도 정치자금이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믿는 재계관계자는 없다.
***관행 여전히 남아 모그룹의 관계자는 『청와대는 받지않지만 피부로 느끼는 부담으로 보면 규모의 문제지 여전히 존재한다』고 불평했다.
그렇다면 재계는 왜 이렇게 거액헌납을 주저하지 않는가.
앞서 밝힌 H그룹회장은 『통치권자의 요구와 관계설정도 그렇거니와 갖다 주면 이에 맞먹는 반대급부가 있지않느냐.주판을 잘 놓아보면 통치권자의 마음을 잘사는 것이 장관이나 부처를 통하는것보다 이익이다』고 털어놓는다.
앞으로가 더 문제라고 우려하는 재계관계자도 늘고 있다.
지자체 선거를 계기로 정치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면서 더 많은 정치자금이 필요할 것이라는 우려다.
D그룹의 고위관계자는 『기업으로서야 정부든 정치권이든 모셔야할사람들이 적은 것이 좋다.시어머니의 수가 늘면 늘수록 그만큼비용은 증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정부부서의 통폐합은 확실히기업의 비용을 줄이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 했다.
기업들이 비자발적인 정치헌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좀더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재계의 관측이다.
〈趙鏞鉉기자〉 〈다음회에는「통치자들 왜 비자금에 집착하나」를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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