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한국현대사>39.臨政동향 이승만에전한 張鵬보고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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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920년 3월25일부터 22년 11월 22일까지 상해임시정부 주요 지도자들의 움직임과 만주독립군,국내 독립운동 소식을 자세히 기록한 보고서가 처음 발견됐다.이 보고서는 임시정부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의원을 지낸 장붕(張鵬)이 미 국의 이승만(李承晩)대통령에게 사신(私信)형식으로 보낸 자료로 이화장(梨花莊)에 소장돼 있는 것을 유영익(柳永益.한림대)교수가 발굴,本社 현대사연구소에 제공한 것이다.「장붕보고서」의 주요 내용을발췌해 소개한다.
[편집자 註] 1920년 3월25일 장붕은 상해로 온후 첫 보고서를 이승만에게 보냈다.
『저는 작년 여름에 이곳에 도착해 처음에는 생소하고 그후에는하는 일이 여의치 못합니다.이곳의 형편은 다소 부족한점이 있으나 통괄해 말하면 진보하고 있는 중이고 무엇이든지 조직적으로 돼가고 있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옵고 그곳의 사 업만 전심(專心)하십시오.』 장붕이 보고에서 가장 신경쓴 것은 당시 이승만대통령과 경쟁관계에 있던 임정 노동국총판 안창호(安昌浩)와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의 동향이었다.그는 20년 7월2일 임정의 3분의 2 이상을 안창호가 장악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이승만의 대응책을 건의했다.
『安군이 상해에 도착한 이래로 일본에 유학한 청년들을 받아들여 결속하고 차장(次長)도 삼으며 인심을 취합하며 국내에서 독립자금 모금운동을 하는 동시에 자기의 세력도 모으는 모양이며…상해정부는 다 安군의 심복과 평안도인(平安道人)의 장악물이 될것이요,최후에 결전할 것은 오직 각하뿐이오니 각하의 응전책이 어떠하신지요.』 그러나 장붕은 장기적으로 정세가 낙관적이라고 전망했다.
『이동녕(李東寧.내무총장).이시영(李始榮.재무총장).신규식(申圭植.법무총장) 세사람은 확실히 각하를 반대할 의향이 없습니다.각하의 선전사업이 잘 진행되고 공채(公債)모금의 성적이 양호해 장래의 재정전도(財政前途)에 궁핍이 없으면 그 반대하는 것도 과히 겁낼 것은 없습니다.』(7월30일) 장붕은 안창호와경쟁관계에 있던 이동휘가 상해정부를 반대하고 이승만도 반대하고있다는 보고를 여러차례 보냈다.8월21일에는 직접 이동휘를 방문해 대담한 내용을 기록했다.
『▲각하(이승만)는 정신상으로 적대적 위치에 있으니 철두철미반대하겠다 하며▲상해와 만주.러시아지역의 일은 자기가 각료와 협동해 행하고 미주(美洲)와는 연락하지 않겠다 하며▲安군이 돌아오면 화합하게 지내겠다 합니다.』(8월21일) 장붕은 또한 당시 임정에 참여한 일부인사들이 독립운동보다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챙기는 실정을 거론하고 이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표명했다. 『상해의 형편은 대소를 막론하고 각각 자기의 세력.명예.당파를 수립하려 노력하고 국가독립사업에 집중하는 자가 부족하오이다.독립사업이라도 자기에게 이익이 돼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하지 않고 독립사업에 유익할 방책이라도 자기의 의사나 자기 당의주장이 아니면 행하지 않고 심지어 파괴하기까지 하니 한심할 뿐입니다.』(8월8일) 장붕은 이러한 현상을 타파하고 임정 지도자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방책으로 12가지 사항을 이승만에게 건의했다.그중 중요한 내용을 보면▲상해에 있는 국무원(國務院)에 위문서(慰問書)를 자주 발송할 것▲제당파(諸黨派)를 타파하며 지방열 고취를 엄금(嚴禁)할 것▲임시정부로 속히 송금(送金)할 것▲구미위원회(歐美委員會)와 상해정부가 연락을 갖도록하고 중대사건은 서로 협의한 뒤 단행할 것을 서로 약속할 것▲국내의 이상재(李商在)씨와 직접 연락해 국내인심을 수습 할 것▲각 단체의 수령을 관대히 대해 그 마음을 획득할 것 등이다(7월2일).
이중에서도 장붕은 『각 파의 분쟁을 상관하지 마시고 초연적 태도로 하시며 내 편,네 편을 막론하고 공정히 판단하시고 당파분쟁에 참여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9월8일).그는 광복 후를대비해 천도교 총수인 손병희(孫秉熙)에게 친서를 보내 제휴할 것을 제안하는 치밀함도 보였다(7월16일).임정 내의 세력관계와 함께 장붕이 가장 신경쓴 것은 재정문제였다.
당시 임정은 『금전이 필요한데 금융이 고갈(枯渴)돼 아무 일도 착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이러한 상황에 대해 장붕은 계속 이승만에게 보고하고,다음과 같은 금전수집방법을 제안했다.
『한국의 생활곤란으로 인해 매일 2백~3백명이 만주로 이주하오니 이들을 대상으로 구제채표(救濟彩票.Lotting)를 발행하되 그 표수는 1백만장 이상으로 하고 매장에 10달러로 하면그 총금액의 수집성적이 양호해 1천만달러 이상이 된다고 가정하면 그 금액의 10분의1 또는 2는 광고료와 그외 경비로 충당한다.금액의 대부분은 한미합작흥업은행(韓美合作興業銀行)을 상해에 설치하고 비밀리에 독립운동의 금융기관을 만든다.또 이를 이용해 만주의 광활한 미개간지를 매입 하고 국내의 궁민(窮民)을유도해 이주 영농케하면 일거양득이며,미국으로부터 농기구를 구입하고 기사(技士)를 초빙해 대규모로 농업을 경영하면 많은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3월25일) ***자금모집 성과 없어 이러한 그의 제안은 자금모집이 제대로 되지 않아 성과를 내진 못한 것으로 보인다.
장붕은 이승만이 상해에 부임하는 시점을 결정하는데도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당시 이승만은 상해임정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뒤에도 상해에 부임하지 않아 반대파들의 비판이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다.
『이곳에서 좋은 기회를 얻은 듯이 각하를 이곳까지 오시게 운동하는 중인데 이는 다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다만공채사건(公債事件)이나 여러가지 작은 허물을 찾아내 공박(攻駁)하자는 의사에 불과하오며 각하를 위해 생각하는 사람은 다 친히 오시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7월16일).장붕은 이승만이상해에 오려면 몇만원은 갖고 와야 임정의 재정난을 해소하고 반대파들을 무마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상해에 왕림(枉臨)하시려면 시기가 조금 이른 듯하고 돈 몇만원은 준비돼야 하겠소이다.재정이 고갈된 정부,생활곤란을 당한각료들,만주에서 무장준비하는 제군단(諸軍團)들,또 동지의 생활비들에 조금이라도 쓸 돈이 있어야만 하겠소이다 .깊이 생각하시고 돈이 준비되거든 통지하시옵소서.』(9월8일) ***“몇만원은 가져와야” 이승만은 이 보고를 받은 지 3개월 뒤인 1920년 12월28일 상해에 도착했다.그러나 충분한 재정을 확보하지 못한 이승만은 임정내부의 갈등을 수습하는데 실패하고 6개월만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승만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 장붕의 편지는 다시 이어졌다.이후의 보고는 대부분 「분열된 임시정부를 개편한다」는 명목으로 안창호와 만주의 항일단체들이 중심이 돼 추진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집중돼 있다.
마지막 편지에서 장붕은 『국민대표회의가 또 연기됐고 설사 된다 해도 별 결과를 얻지 못할 것』(1922년 11월22일)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해 국민대표회의는 1923년 1월3일 개최됐지만 임정의 개편을 주장하는 세력과 임정을 해체하고 새로 조직하자는 세력이 대립해 결국 아무런 성과없이 끝나버렸다.
〈현대사연구소 연구팀〉 ▲金祥道.鄭載憲기자 ▲李東炫(현대사전문기자.政博) ▲鄭昌鉉(현대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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