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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민순 발표, 노 - 부시 회담 내용과 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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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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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의 북핵 외교가 기로에 섰다. 북한은 새 정부의 대북정책을 전면 부정한다. 미사일 발사에 이어 당국 접촉을 전면 중단하고, 군의 대응 조치까지 예고했다. 북한을 파키스탄 같은 핵보유국으로 인정해, 핵을 베고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핵을 포기하도록 만들 것인가. 그 첫 관문이 한·미 정상회담이다. 회담의 성공을 위해선 지난 정부의 북핵 외교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시스템의 파괴와 특정인의 독주, 코드에 맞춘 왜곡으로 점철된 때문이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기 한 달 전인 2006년 9월 14일 한·미 정상회담을 살펴본다.

공동의 포괄적 접근 방안을 놓고 한·미 간 불협화음은 상당했다. 이 말이 나온 지 1년 반이 된 지금 미국 측 실무자들이 입을 모아 부정적 평가를 내린다.

◇“사실무근은 아니나 의미도 실체도 없어”=익명을 요구한 당시 미 행정부 관계자는 “미국은 미국의 손에 수갑을 채울지 모르는 이 방안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송민순 당시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은 2006년 우리를 만나 무조건 대북 지원,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 동결 해제, 북·미 관계 정상화, 평화조약 등 모든 인센티브를 테이블에 올려 놓고 북한을 설득하자고만 요구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북한이 금융 제재를 핑계로 대화를 거부하면서 미사일까지 발사하는 상황에서 미국으로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며 “백악관 관리들은 ‘미국은 한국 요구처럼 극도로 유연(super flexible)할 수 없다’고 일축했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한국이 같은 주장을 반복하자 당시 데니스 윌더 국가안보회의(NSC) 선임보좌관과 빅터 차 백악관 아시아 담당 보좌관 등은 화가 났고 한때 송 실장 측에 “그만 하라(stop it)”고 말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빅터 차 보좌관은 2006년 한·미 정상회담 직후 ‘공동의 포괄적 접근방안’에 합의했다는 송 전 실장의 발표는 “정상회담 내용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며 “더 많은 논쟁이 야기될까봐 공개적으로 부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국무부 관계자도 “공동의 포괄적 접근은 북핵 프로세스와는 무관한(irrelevant) 이슈였다”며 “한국이 2006년 이 말을 공표한 이래 미국 관리 중 그 말을 쓴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의 북핵 정책과 한국의 남북 화해정책이 병행돼 포괄적으로 다뤄져야 한다는 한국의 소망을 담은 말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 미국은 북핵 해결에 집중해 온 반면, 한국은 남북 화해·긴장 해소를 더 중시했다”고 말했다.

미국 관리들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공동의 포괄적 접근에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는 한국 측 주장에도 의문을 표시했다. 한 소식통은 “라이스 장관은 늘 한국 측 파트너들에게 공손한(polite) 태도를 취했다”며 “이를 동의했다는 의미로 보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그러나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2006년 7월부터 9월 정상회담 직전까지 라이스 국무장관 등 미국 측과 세 차례나 만나 공동의 포괄 접근 방안을 제의한 끝에 라이스 장관의 동의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안의 중대성 때문에) 라이스 장관과 독대해 주요한 키워드를 종이 한 장에 20단어 정도로 요약, 큰 틀에서 협상했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라이스 장관 외의 미국 관리들로서는 명시적 동의가 없었다고 여길 수 있다는 주장이다.

◇“미국의 정책 전환이 2·13 합의 성사 배경”=2·13 합의 성사는 공동의 포괄적 접근이 아니라 미국의 결정 때문 이라고 미국 관리들은 입을 모았다. 당시 미 행정부 당국자는 “부시 행정부는 2006년 12월과 이듬해 1월 사이 북한이 정말 (비핵화에)진지한지(serious) 분명한 실험(clear test)을 해본다는 전략을 택했다”고 밝혔다. 그 시점은 2006년 12월 6자회담이 실패로 돌아간 직후였다. 부시 행정부는 중국만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직접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행동으로 확인되는 만큼만 미국도 전향적 조치를 취한다는 전략으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스티븐 해들리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이에 따라 빅터 차 전 보좌관에게 전략메모 제출을 지시했다. 차 전 보좌관은 ^북한이 얼마나 비핵화에 진지한지 측정하기 위해 6자회담 틀 내에서 양자 대화를 하고 ^북한과 행동 대 행동으로 진전을 이루어가되 ^그럼에도 북한이 약속 이행을 거부하면 미국은 할 일을 다했다는 명분을 얻고 국제사회의 일치된 압박을 끌어낼 수 있다는 골자의 메모를 제출했다. 얼마 뒤 부시 대통령은 “마지막 시도(push)를 해보자”며 이 메모를 승인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2007년 1월 17일 베를린에서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이 회동했고 한 달 뒤 2·13합의가 성사됐다는 게 미국 전·현직 관리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이 과정에서 한국의 기여는 거의 없었다고 지적했다. “한국은 오로지 미국이 북한을 압박하지 말고 양자 대화를 하며 유연성을 보이라고 요구하는 게 전부였다”고 주장했다.

다만 2007년 1월 베를린 북·미 회동과 2·13 베이징 합의 사이에는 한국이 태도를 달리해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고 이들은 덧붙였다. 당시 힐 차관보와 성 김 국무부 한국과장이 천영우 한국 6자회담 수석대표 등을 만나 “북한과 최종 합의를 볼 때까지 북한에 대한 지원을 끊고 대화도 자제해 달라”고 요구했는데 한국이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미국 관리들은 “북한이 달라진 한국의 강경한 태도에 압박을 느낀 점이 2·13 합의 성사의 한 원인이 됐다고 볼 수 있다”며 “진작 한·미 공조가 이렇게 잘 이뤄졌다면 북핵 문제가 더 빨리 진전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송 전 장관은 “(2·13 합의는) 공동의 포괄적 접근 방안을 리바이벌해서 나간 것”이라 고 주장했다.

◇처음에는 ‘포괄적 해결’ 제안=당시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상황을 지켜본 정부의 한 소식통은 “BDA 북한 자금 동결 문제가 6자회담 발목을 잡아 1년 넘게 교착 상태가 계속되니까 이를 어떻게든 풀어보자고 한국 측이 제안한 게 공동의 포괄적 접근 방안”이라 주장했다. 그는 한국이 ‘포괄적(comprehensive)’이란 말을 제안했으나 미국이 이 표현을 꺼렸다고 설명했다. 중동 평화회담에서 이 말이 유래했기 때문이다. 중동 평화회담이 여러 번 실패로 돌아가면서 ‘포괄적’이란 용어는 미국의 협상 원칙을 훼손하고, 협상 과정을 뒤죽박죽으로 만든 주범으로 낙인찍혔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은 ‘comprehensive’ 대신 ‘broad’를 내놓았고, ‘해결’ 대신 ‘접근(approach)’으로 표현을 바꿨다고 한다.

특별취재팀=강찬호 워싱턴 특파원, 정치부문 김수정·예영준·채병건 기자, 국제부문 정용환·이수기 기자

◇공동의 포괄적 접근 방안=2006년 9월 14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 정부가 양국 간에 합의됐다고 발표한 북핵 해결 방안. 한·미가 함께 움직이고(공동의) 대화와 압박을 모두 올려놓고(포괄적) 6자회담 재개와 9·19 선언의 비핵화 합의를 유도한다는 구상. 이 방안엔 BDA 금융 제재를 풀어 북·미 간 대화 국면을 조성하고, 이에 상응해 북한은 핵시설 불능화 등에 나서며, 이런 ‘당근’ 조치가 통하지 않을 경우 한·미가 공동으로 대북 압박에 나선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노무현 정부는 공동의 포괄적 접근 방안을 한국의 능동적·적극적 역할을 보여주는 사례로 강조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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