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미래]골룸의 명연기 비결 모션 캡처<motion capture>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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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3면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든 캐릭터인 '골룸'의 연기는 명배우를 뺨친다. 얼굴 표정이며 뒹굴거나 달리는 동작 등 어느 것 하나 컴퓨터 캐릭터의 움직임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스럽다. 꿈꿀 때 눈꺼풀의 움직임이나 표정의 변화도 사람이 직접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골룸은 그 역할과 독특한 모습으로 반지의 제왕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고들 한다. 이는 '모션 캡처(Motion capture)'라는 컴퓨터 기술 덕이다.

컴퓨터 기술이 흥행을 좌우할 정도의 특수 효과를 낸 것은 어제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캐릭터를 실제 배우가 연기하는 것과 똑같이 만드는 모션 캡처 기술은 대박을 터뜨리는 영화의 필수요소로 자리잡았다. 1000만 관객을 동원한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도 모션 캡처 기술은 한몫을 단단히 했다.

요즘에는 영화에서뿐 아니라 병원에서 환자의 보행교정, 스포츠계에서는 선수의 자세 교정 등을 위해서도 모션 캡처 기술이 활발하게 활용되고 있다. 모션 캡처의 전성기를 맡고 있는 것이다.

모션 캡처는 실제 배우가 하는 연기를 적외선 카메라로 찍어 그 동작 그대로를 캐릭터에 옮겨주는 것이다. 그러면 캐릭터는 배우의 동작 그대로를 흉내내게 된다.

골룸의 연기는 실제 중견 배우인 앤디 서키스가 했다. 골룸이 언덕에서 굴러 떨어지는 장면을 예를 들면, 그 연기는 서키스가 모션 캡처 장비가 설치된 실내 세트장에서 촬영한 것이다. 서키스가 온 몸에 착 달라붙게 입은 옷 위에는 적외선 카메라가 알아보는 구슬 33개가 붙어 있다. 뼈를 돌리거나 들거나 하는 움직임을 알 수 있게 구슬을 붙인다. 즉, 손등에 두개, 팔뚝에 한개, 머리 양 옆.머리 꼭대기에 한개씩 등 삼각형이 이뤄지도록 한다. 그래야 적외선 카메라가 각각의 뼈나 몸 부위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지를 알아낼 수 있다.

사각 촬영장에 설치된 적외선 카메라는 한면에 3대씩 모두 12대. 서키스는 골룸이 언덕에서 굴러떨어지는 모습을 연기하기 위해 한변이 9m인 정사각형 안의 세트에서 굴러 떨어진다. 그러면 적외선 카메라는 서키스의 몸에 붙은 구슬의 위치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잡아낸다. 적외선 카메라에서 신호를 받아들이는 컴퓨터 화면에는 서키스가 아닌 구슬들의 움직임만 나타난다. 머리에 붙은 구슬 등 온 몸에 붙은 구슬이 계속 구르며 변하는 위치는 컴퓨터에 숫자의 변화로 기록된다. 이는 동작의 변화만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일반 카메라처럼 서키스의 모습이 찍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구르는 동작이 기록된 데이터를 골룸 캐릭터에 집어넣으면 골룸이 언덕에서 굴러 떨어지듯 몸이 움직인다. 실제 영화에서는 야외 촬영소의 장면을 찍은 뒤 골룸 캐릭터가 굴러 떨어지는 모습을 합성하면 영화의 한 장면이 만들어진다.

골룸의 연기를 대신한 서키스의 연기를 모션 캡처한 것과 똑같은 장비가 있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게임기술지원센터(경기도 분당 소재). 여기는 '태극기 휘날리며'에 들어간 모션 캡처를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영화에는 중공군이 벌떼처럼 산을 타고 몰려 오는 장면이 있다. 그 많은 중공군을 엑스트라로 쓴다면 제작비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게임기술지원센터에서는 세트장 안에 약간 경사진 세트를 만든 뒤 총을 들고 돌진하는 장면을 한 사람이 수백번 되풀이하면서 찍는다. 매번 동작이 달리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 동작을 수많은 중공군 캐릭터에 무작위로 집어넣었다. 그렇게 해서 만든 영화에서는 벌떼처럼 몰려오는 중공군 캐릭터가 제각각 움직이며 돌진해 오는 것으로 보인다.

게임기술지원센터 박근표 기술원은 "우리나라는 아직 영화에 이 기술을 적용한 게 얼마 되지 않고 제작비가 많지 않아 골룸과 같은 주연급 캐릭터를 만들어 쓰지 못하고 있다"며 "주로 눈에 잘 띄지 않는 군중의 뒤편에 몰려있는 사람,'태극기 휘날리며'의 경우 중공군에서도 멀리 보이는 사람들 같은 곳에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골룸과 같은 캐릭터는 얼굴 표정까지도 만들어 넣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골룸의 얼굴 표정 연기는 몸 동작과는 별도로 실제 배우의 얼굴에 100여개의 작은 표시장치를 붙여 표정의 변화를 잡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모션 캡처는 보행 분석이나 체육 선수들의 자세 교정에도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현대 아산병원 재활의학과에서는 월평균 4건 정도 보행 분석을 하고 있다. 바닥에는 근육의 힘을 측정하는 판을 놓고, 각 몸에는 적외선 반사 표시 구슬을 붙여 보행의 이상 부위와 원인을 찾아낸다. 이 병원 재활의학과 유종윤 교수는 "관절이 움직이는 각도와 보행의 이상 정도를 정밀하게 분석해 정확한 수술을 하는 데 응용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간판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트 김동성 선수도 이 기기의 덕을 톡톡히 봤다. 전 국가대표 전명규 감독과 국민체육진흥공단 체육과학연구원 이순호 박사는 출발 자세를 모션 캡처 기기로 분석해 군더더기 없는 출발 자세를 만들었다. 김선수가 세계적인 선수로 크는 데 모션캡처가 큰 역할을 한 셈이다. 국가대표 창던지기 박재명 선수, 역도의 이대영 선수 등도 역시 모션 캡처로 동작을 잡아 자세를 교정했다.

인터넷에서 모셥 캡처는 네티즌들의 춤을 가르치는 데도 응용되고 있다.'아이댄스'라는 사이트에서는 가수 디바 등 유명 댄스 가수들의 춤 동작을 모션 캡처로 잡은 뒤 캐릭터에 입력해 네티즌들이 그 캐릭터의 춤 동작을 보며 유명가수들의 춤을 배울 수 있게 하고 있다.

박방주 과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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