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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4천억 비자금說을 보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정치권에서 다시 어이가 없는 파장을 몰고 왔다.억장이 무너지고 또 무너진 삼풍 사건이 아직 마무리도 되지 않은 때에 이것은 또 무슨 불집인가.4천억원 가명계좌 발설 사건을 놓고 정치하는 사람들끼리는 설왕설래 말을 꿰어 맞추려고 법 석들이지만,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정치권은 또한번 시민의 가슴을 무너뜨렸다. 도대체 우리 땅에서 끝내 무슨 일로 끝장을 보려고들 이러는가.「문민정부」「깨끗한 정치」를 흔들어대던 기치를 바라보며 희망을 걸었던 시민은 도처 곳곳에서 수상하게 번지는 상한 냄새때문에 어지럼증을 일으키고 있다.그래도 정치하는 사람 들에게 미래를 걸고 열심히들 일하면서 세금도 내고 나라 걱정도 하는 사람들이 어리석은 것일까,순진한 것일까.
『정치가들이란 침몰해 가고 있는 타이타닉(Titanic)호에서 갑판의자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정신 나간 사람들과 같다』고말한 앨빈 토플러의 말을 믿어야 하는 것인가.
괴(怪)자금설은 벌써부터 시중에 떠돌고 있었다.소문을 대수롭잖게 여겼거나,권력은 소문도 묶어 둘 수 있다고 과신했었는지 모르지만 방귀가 잦으면 무엇이 된다고,소문이 농익어서 실체를 드러낸 것일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4천억원.우리 주부들은 10만원짜리 수표와 1백만원짜리 수표의 색깔도 얼른 구별할 줄 모른다.가격표를 들여다 볼 때마다 하나.열.백.천.만 단위의 자리수를 하나하나 꼽으면서 살고있다.장바구니를 들고 있던 주부는 자연식품이라는 명목 으로 두부값이 천원이 넘자 한숨부터 쉬어야했다.
며칠전,자장면 배달 8년만에 4천만원을 저축한 소년 가장의 이야기가 방영되어 우리에게 신선한 감동을 안겨준 일이 있다.기묘한 대조다.4천억원과 4천만원.그 소년처럼 먹지도 않고 입지도 않고 차곡차곡 쌓는다면 80년후에야 4억원이 된다.그렇게 4천억원이 되려면 몇년이 걸리는 것일까.
어차피 우리들 서민에게 그 천문학적 숫자는 딴세상 이야기다.
며칠전 지하철 노조가 임금인상 몇%인가를 타결했다고 피차 가슴쓸어내리며 다행스러워했다.몇달을 두고 씨름해서 얻어낸 인상 수치라야 불과 몇만원선이었을 것이다.가장■家長)의 월급이 올랐다고 아내와 아이들이 흐뭇해 했을 표정이 눈에 선하다.시민은 그렇게 피가 나게 살아간다.끊임없이 땀을 흘리지 않으면 입에 풀칠이 안되는 것이 서민의 삶이다.
그런데다 세계적인 경제전쟁이 숨통을 조여 오고 있다.우리나라에서는 하루에도 몇십,몇백개의 중소기업이 문을 닫고 있는 실정이다.어떻게 4천억원이라는 괴자금이 떠돌이 귀신처럼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해 서성거리다가 이렇게 전국을 어지럽히 고 다시 억장을 무너뜨리는가.
아무리 고쳐 생각을 해 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정치가가 주무른다는 그 많은「돈」에 관해서다.도무지 생산적인 일을 하는 법이 없는 정치가들이 왜 돈을 그렇게 많이 가져야 하는가.돈은 땀의 값이어야 한다.땀흘리지 않은 자가 지 닌 돈은 독이 되어 많은 사람을 해치고 있지 않는가.
땀흘려 일하지 않고 머리만을 굴리는 사람들이 땀흘리는 사람들보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것이 자본주의의 생태라면 자본주의는 공산주의가 허망하게 무너진 것보다 더 허무하게 무너질 날이멀지 않을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건,땅이 꺼지건 그까짓 4천억원이 우리하고 무슨 상관인가.어차피 그것은 우리들 세상 일이 아니다』라고 백성이 아예 상관하지 않고 외면을 해버릴 때,그래서 정치인 자기들끼리 자기들식으로만 물에 기름처럼 떠돌게 되면 역사 는 또다시페이지를 바꾸어버릴는지도 모른다.
대구참사로 수백명의 사상자가 피를 흘린지 한달이 안돼 청와대뜰에서는「열린 음악회」가 흥을 돋우었었다.그리고 다시 한달여만에 삼풍이 무너졌다.그렇게 어이없게 목숨을 잃은 그들은 남아 있는 우리들을 위한 제물(祭物)이었다.우리 모두 마음의 베옷을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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