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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시대의 바둑 ④ 바둑학의 현재와 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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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바둑의 더 깊은 경지를 배우려는 유럽·남미·아시아의 외국 유학생들로 인해 명지대 바둑학과는 짧은 기간에 ‘명물’로 떠올랐다. 사진은 바둑학과의 외국 유학생들.

명지대에 ‘바둑학과’가 개설된 것은 1997년으로 올해 겨우 11년이 됐다. 당시 명지대 총장이었던 고건 전 국무총리가 바둑학과 창설의 주인공이다. 바둑의 골수 팬이나 프로기사조차 ‘바둑학’이란 생소한 이름에 어색함과 민망함마저 느끼던 시절, 고건씨는 “우리 것을 낮추어 보지 말자. 바둑엔 인생 철학과 경영전략, 아동 교육, 치매 예방 등 기술 이외에 풍부한 연구과제가 담겨 있고 세계에 자랑할 만한 동양문화를 가득 품고 있다”고 설파하며 혼자 행정부와 학교를 설득해냈다. 바둑학이 훗날 어떤 세계적 위상을 확보한다면 그 첫째 공은 의당 그에게 돌아가야 할것이다. 바둑의 의미와 가치, 바둑 수법에 대한 연구 등은 고대 중국의 한(漢) 나라 이후 꾸준히 이어졌고 근대 일본에서도 바둑의 기원이나 최초의 기보 등 역사적 사실에 대한 책자들이 뜸뜸이 발간되었다. 유럽의 초·중등학교나 미국의 대학에서 간헐적으로 바둑을 강의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세계 최초로 ‘바둑학’이란 학문이 대학에서 독립된 학과로 간판을 내걸게 된 것은 한국이 처음이다.

한국 현대바둑의 대부 조남철 9단은 가끔 이렇게 50년 전을 회상하곤 했다. “수표교 다리 옆을 지나가면 말이야. 아줌마들이 쉬쉬하며 ‘저기 노름꾼 대장 간다’고 말하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아.” 한데 바둑학이라니! 소식을 들은 조남철 9단이 깜짝 놀랄 만도 했다.

하지만 바둑학과는 창설된 지 불과 5, 6년 후부터 빠른 속도로 한국 바둑 세계화의 첨병으로 떠올랐다. 현재 외국에서 온 유학생만 10명이다(표 참조). 독일이 4명으로 가장 많고 바둑의 종주국임을 자랑하는 중국과 대만, 바둑 신생국이라 할 세르비아와 브라질·태국에서도 유학생이 와 있다. 헝가리에서 온 디아나는 얼마 전 한국기원에서 프로 초단 면장을 받았다. 러시아의 유학생으로 이미 프로 자격을 얻은 샤샤와 스베타에 이어 외국 태생 프로기사 3호다.

바둑학과는 영문 바둑 서적을 출간하고 학생들이 매년 유럽·호주·동남아 등으로 가 바둑 지도를 하며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 독일의 윤영선 4단이나 강승희 2단 등이 해외 보급의 터를 확고히 잡을 수 있었던 것도 바둑학과를 다니며 바둑 영어와 교육법을 배운 것이 주효했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여전히 바둑학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질문하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바둑학과 창설의 또 다른 주역인 정수현(교육학 박사·프로기사 9단) 교수는 “동양 전래의 두뇌 경기인 바둑을 대상으로 그 본질을 규명하고 기술을 탐구하며 바둑과 관련된 활동 및 실용적 기능을 다양한 접근법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해준다. 바둑판 속의 기예 탐구에서 나아가 바둑인, 바둑 교육, 바둑 마케팅 같은 요소를 함께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 교수진은 정수현씨 외에 심리학 박사인 최일호 교수, 여자 프로기사이자 영문학 석사인 남치형 교수, 체육학 박사인 김진환 교수 등 4명과 강사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바둑 실기에 관한 이론 연구가 3분의 1쯤 되고 바둑 영어, 바둑 경영론, 바둑사, 게임학, 바둑 심리학, 컴퓨터와 바둑, 아동 바둑 지도론 등 다양한 교과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1년부터는 국제바둑학술대회를 매년 열어 일본과 중국·유럽·미국 등에서도 학자들이 참가하고 있다. 올해 국제바둑학술대회는 세계아마선수권대회와 함께 11월 고양시에서 열린다. 그러나 바둑학은 이제 겨우 시작이다. 바둑이 실용적 가치로 내세우고 있는 ‘아동 두뇌 개발’이나 ‘치매 예방’이란 분야만 보더라도 구체적 실적은 아직 없다. 의학이나 교육학, 노인학이나 여가학 같은 인근 학문과의 유대가 절실한 점도 난제로 지목된다.

마인드 스포츠 시대의 이론 개발, 스포츠를 선택한 바둑의 정체성 변화와 그에 따른 제도의 변화 등 당면한 난제에 지침을 제공하는 일도 바둑학이 떠맡아야 할 과제다.

바둑학과는 90%가 넘는 높은 취업률을 자랑하고 있어 그 출신들이 머지않아 바둑계의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떠오를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바둑학은 바둑 안에 머물러서는 날개를 활짝 펴기 어려울 것이다. 바둑은 정신세계의 문제에 좀 더 다가가야 한다. 또 바둑을 통한 인공지능 개발이나 새로운 경영전략 개발 등 바둑 밖의 영역에서 실적을 보여주거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바둑학은 세상의 주목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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