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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원하는 삶의 질은 …” 한 마을의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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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삶의 질 향상’은 현재 우리가 추구하는 대부분의 계획에서 가장 절실한 목표의 하나로 거론된다. 작게는 동네에 버려진 작은 공간을 한 평 공원으로 바꾸는 자투리 녹지계획에서부터 크게는 최근 새 대통령이 제시한 국가의 경제 활성화 계획에 이르기까지 모두 삶의 질 향상을 절실한 목표로 제시한다.

이렇듯 도처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계획의 목표인 ‘삶의 질 향상’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구체적으로 생각해 봤을까. 집에서, 동네에서, 도시에서, 그리고 나라 전체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질 향상의 내용은 무엇이 될까. 우리는 삶의 질 향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위의 질문에 명쾌한 답변을 제시하는 것은 어렵다. 사안별로 답변이 다 다를 수도 있고, 사람마다 각자 다른 것을 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수렴되는 삶의 질 향상의 내용이 쉽게 이해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보행약자가 더 세심히 배려되는 가로환경계획(서울도심부), 주민의 공동체 생활이 더 편리하고 친환경적으로 장려되는 마을계획비전(서울 성미산마을), 혹은 주민이 참여해 함께 이룬 지역의 도시기본계획(청주시) 등은 비교적 공감이 가는 삶의 질 향상의 목표를 감지시키는 사례들이다.

기존의 접근 방식과는 다르게 삶의 질 향상을 실현하려는 지역 및 마을 계획의 사례들이 점차 늘고 있지만 물리적 환경계획을 통해 삶의 질 향상과 같은 사회적인 목표가 과연 얼마나 현실적으로 맞물려 준비될 수 있을까.

지난 가을 학기, 강원도에 있는 한 마을의 삶의 질 향상 마스터플랜을 공부할 수 있는 감사한 기회가 있었다. 지역계획에 열정을 갖는 고마운 대학원생들, 기꺼이 참여해 준 마을 주민들, 새로운 시도를 기꺼이 수용하려는 지역 공무원들과 함께 마을에서 삶의 질을 향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열심히 고민해 보았다. 일상생활에서 원하는 것이 다를 수 있는 여러 계층 (노인·청소년·어린이·주부·이주여성 등)들이 각기 사는 지역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실히 알아내어 세분화된 마스터플랜에 담아 보고자 했다. 이 과정을 통해 새삼 다시 알게 된 것이 많았다.

그동안 삶의 질 향상의 내용에 대해 다소 추상적으로 접근하면서 혼란스럽다고 불평을 하고 있는 사이 지역 현장에서는 이미 놀랄 만큼 많은 서비스 프로그램으로 삶의 질 향상에 나름대로 기여하고 있었다. 삶의 질에 관련되는 각종 프로그램들은 이름도 예쁘게, 찾아가는 의료서비스, 방과후 학교, 신나는 주말학교, 학교 밖 청소년캠프, 노인 체조교실, 빨래도우미, 효자손 서비스, 또래 상담자 양성교육, 결혼 이민자 가족 간담회 등 수도 없이 많았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제대로 담아내는 물리적인 공간을 적절히 제안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마을계획의 큰 부분이 짜일 정도였다. 이 밖에도 외진 지역 청소년의 문화와 스포츠 욕구, 유아와 어린이 놀이터, 노인들이 걷기 좋은 마을 길 정비 등 다양한 삶의 질 향상의 구체적 현안이 있었다. 결국 물리적 환경계획과 사회 프로그램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지점에서 삶의 질 향상 마을계획이 수립될 수 있음을 알게 된 참으로 귀한 경험이었다.

한편 지난해 이 지역의 마지막 주민회의에서는 마을 입구에 세계에서 가장 큰 노루 동상과 같이 누가 보아도 깜짝 놀랄 만한 기념물의 설치 없이는 우리가 함께 준비한 마을계획이 뭔가 빠진 것 같다고 크게 아쉬워하는 주민도 있었다. 이에 대해 답변을 드리려 하자, 다른 주민이 먼저 손을 들고 일어나서 이 마을계획은 이제 누구에게 뭘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생활이 좀 더 편해지도록 우리가 결정하고 작은 것부터 함께 고쳐 가 보자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다행이고 감동이었다.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주민들의 마을계획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박소현 서울대학교 건축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