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분단, 400년전 ‘임란’이 원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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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일본군 선발대가 부산 연안에 상륙함으로써 임진왜란은 시작됐다.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이 부산에서 서울까지 점령하는 데 채 20일이 걸리지 않았다. 올해는 임진왜란 발발 416년, 종전 410년이 되는 해다. 송복(70·사진·左) 연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와 한명기(46) 명지대 사학과 교수가 8일 오후 중앙일보 회의실에서 만나 임진왜란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특별 대담을 했다. 송 교수는 정년 퇴임 이후 ‘조선의 리더십’연구에 몰두했고, 지난해 말 『위대한 만남-서애 류성룡』을 출판하며 임진왜란의 성격과 관련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임진왜란을 한반도 분단의 원류로 파악하면서, 분단을 저지하는 리더십을 발휘한 인물로 서애 류성룡을 부각시켰다.

한명기 교수는 『임진왜란과 한중관계』를 1999년 펴낸 이래 임진왜란 연구와 관련해 대표적으로 손꼽혀온 소장 역사학자다. 일본과 중국이란 강대국 사이에 낀 샌드위치로서의 한반도 상황은 400여년 전이나 오늘이나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데 두 사람은 공감했다. 또 우리의 힘이 약할 때마다 한반도의 자존은 물론 동아시아의 평화까지 깨지는 상황이 반복됐다는 점을 되새겨봐야 한다고 했다.

송복(이하 송)=나는 오늘날 한반도 분단의 원류를 임진왜란에서 찾는다. 일본과 중국이 400여년 전 한반도를 놓고 격돌했던 역사가 오늘날 현실로 나타나 있다. 임진왜란은 결과적으로 ‘조선 분할 전쟁’이었다. 당시 일본은 ‘조선 할지(割地)’라는 표현을 썼다. 명나라가 구원군을 보낸 이유는 요동과 북경을 지키는 울타리로서 조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번리지전(藩籬之戰·울타리 전쟁)’이라 기록했다. 일본과 명의 조선 분할 의도를 꿰뚫고 그것을 저지하는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한 인물이 바로 서애 류성룡이었다. 임진왜란 당시나 지금이나 한반도는 중·일이라는 큰 호두까기에 끼인 호두 같은 신세다.

한명기(이하 한)= 임진왜란은 16세기 조선의 대일 정책이 파탄에 이른 상황에서 일어났다. 15세기까지 조선은 상당히 개방적이고 탄력적이었으며 군사력도 강했다. 일례로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는 지금도 일본에서 외국인이 쓴 역대 최고의 인문지리서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대외 감각이 16세기 들어 약화되면서, 결국 일본에서 일어난 변화를 읽어내는데 실패했다. 한국의 국력이 너무 약할 때면 동아시아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우리의 자존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일정 수준 이상의 힘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 봐야하는 이유다.

송=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일본이 쪼개면 쪼개질 수 밖에 없고 중국이 합의하자면 합의할 수 밖에 없을 만큼 힘이 없고 가난한 나라였다. 장군은 녹봉이 없고 병사는 병기가 없었다. 군대라고 할 수도 없었다. 흔히 임진왜란 하면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론’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은데, 이는 허구다. 율곡의 사후 수십년이 흘러 그의 제자가 쓴 비문에만 나온다. 당시 조선 인구는 대략 400만명이었다. 이 중 병농이 분리된 군대에 갈 수 있는 20대 남성은 30만명 정도다. 양반·노비·장애인 등을 제외하고 또 농사를 지을 인력을 따져보면 병사 10만명을 양성할 길이 없다. 당시 미곡 생산량은 아주 많을 때가 500만석 정도고, 정부 세입이 60만석이었다. 10만명의 군대를 양성한다해도 그들을 먹일 군량미도 문제다. 류성룡의 계산에 따르면 70만석이 든다. 병조판서까지 지낸 율곡이 이런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반면 임진왜란 무렵 일본은 세계 유수의 군대를 가진 나라였다. 신무기인 조총의 생산량이 당시 유럽 전체의 생산량과 같을 정도였다.

한=그럼에도 두 강국 사이에 낀 조선은 임진왜란에서 망하거나 분할되지 않고 살아 남았다. 오히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왕조가 유지된 반면 명은 청으로,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며 왕조가 교체된 점도 주목해야 한다. 어쨌든 많은 부작용이 있었지만 명군을 불러들인 것은 세종대 이후 내려온 조선의 외교적 역량이 결정적인 순간에 성공했다는 점을 방증한다. 중국과의 외교는 그런대로 성공적이었던 것이다. 일본에 대한 문화적인 우월의식은 저항의 기반이 되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 유지됐다. 또 전쟁기간 동안 의병이 계속 일어난 것은 조선의 지배층이 지방 사회를 통제하는 능력을 상실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하층민으로부터 민심을 완전히 잃지는 않은 것이다.

송=나는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 사회를 ‘의명파(依明派·명나라 의존 세력)’와 ‘자강파(自彊派·스스로 힘을 키우자는 세력)’로 나눠 본다. 역사학자들이 동인·서인·남인·북인·노론·소론으로 나눠보는데, 그건 정치권력 상에선 어느정도 의미가 있겠지만 국가권력의 측면에서는 의미가 없다. 국권을 유지하는데는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자강파에는 류성룡·이순신과 의병이 속한다. 의명파는 선조와 대부분의 신료들이 해당한다. 조선 분할을 막은 최대의 공로자는 자강파의 리더 류성룡이었다.

한=임진왜란 극복의 세 공신을 꼽는다면 이순신·류성룡·곽재우를 꼽고 싶다. 이순신은 동아시아 해역의 패권을 장악하여 명나라의 안보도 지켜냈다. 류성룡은 전시 수상으로서, 한편으로는 왕권을 지키는데 급급한 선조를 보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싸울 생각은 하지않으면서 조선의 내정 간섭을 자행했던 명군 지휘부를 달래느라 고투를 벌였다. 충성심과 애국심으로 뭉친 곽재우는 의병장의 표상이었다.

송=류성룡의 탁월한 리더십이 가장 돋보인 부분은 육군이었던 이순신을 수군 장수로 임명하며 7단계나 승진시킨 일이다. 패러다임을 완전히 전환한 인사기용이었다. 이순신과 류성룡이 바다와 육지에서 온몸을 바쳐 지켜낸 나라를 300년후 후손들은 전쟁 한번 없이 고스란히 일본에 넘겨주고 말았다. 리더십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한=당시 류성룡이 맡았던 가장 치욕스런 일이 명군 지휘부를 만나 일본군과 결전을 벌여달라고 호소하는 것이었다. 명은 자국의 전략적 목표(전쟁을 요동으로 확대시키지 않는 것)가 어느정도 달성된 이후에 조선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강대국들이 남의 나라 전쟁에 끼어 들어 목표를 달성한 이후의 행동 양태는 대체로 비슷하다. 명과 일본의 강화협상이 시작된 이후 ‘조선 문제’는 명 내부의 정치 문제가 된다. 조선은 철저히 소외되고 ‘중·일 전쟁’으로 전쟁의 성격이 바뀌어 가는 것이다. 조선으로서는 생각하지 못한 딜레마다. 명군은 싸울 생각은 않고 장기간 주둔하면서 민폐를 끼쳤고, 일본군은 남해안에 장기간 머물며 약탈과 포로사냥을 자행했다. 이 상황에서 조선 민중은 최악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임진왜란에서 가장 주목해야할 부분은 이런 점이라고 생각한다.

진행·정리=배영대·이에스더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징비록(懲毖錄)=조선 선조 때 영의정으로 임진왜란을 총괄 지휘한 서애 류성룡(1542∼1607)이 전쟁이 끝난 후 전쟁의 상황을 회고하며 기록한 책. 전쟁에 대한 반성과 함께 후환을 경계하는 내용을 담았다. 일본의 장점도 가감없이 싣는 등 사료적 객관성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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