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노트] 몸 무거워 '날아간' 오페라 주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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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가수에게 중요한 것은 목소리인가, 아니면 '비주얼'인가. 소프라노 드보라 보이트(43)가 뚱뚱하다는 이유로 출연 계약 파기를 당하자 세계 오페라계가 찬반 양론으로 시끄럽다. 보이트는 오는 6월 런던 코번트가든 오페라에서 상연되는 R 슈트라우스의 '낙소스섬의 아리아드네'에서 주역으로 출연할 예정이었다.

코번트가든은 이달 초 보이트 대신 무명 가수이지만 날씬한 안네 슈바네빌름을 캐스팅했다. 안그래도 보이트는 100㎏에 육박하는 몸무게 때문에 고민하던 터였다. 그나마 다이어트와 운동으로 38㎏나 줄인 체중이다. 보이트는 영국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코번트가든 측이 내 큰 히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솔직히 털어 놓았다.

미국 언론들은 일제히 비난을 퍼부었다. 뉴욕 타임스는 사설까지 동원해 '몸짱'만 선호하는 유럽 오페라계의 풍토를 문제삼았다. 오페라 가수의 연기는 의상이 아니라 목소리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보이트는 미국 태생으로 1990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98년 파바로티 콩쿠르에서 우승한 바그너 전문 가수.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간판 스타다. 보이트는 지난해 5월 메트에서 '아드리아드네'에 출연했었다.

코번트가든 측은 이번 프로덕션이 현대식 버전이라 보이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명했다. 길다란 천을 휘감은 듯한 고대 그리스 시대의 겉옷이 아닌 몸매가 완전히 드러나는 검정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는 것.

유럽 오페라계에서 이번 사태를 보는 시각은 미국과는 좀 다르다. 보이트 정도면 무대 의상이나 연기 없이 콘서트 형식의 오페라에 출연하는 편이 낫다는 반응이다. 오페라 극장에 가서 눈을 감고 노래만 들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보이트가 98년 코번트가든에서 출연한 R 슈트라우스의 '이집트의 헬레나'도 콘서트 오페라였다. 또 최근 유럽에선 현대 의상을 입고 노래하는 현대 버전이 유행하는 데다 주역 가수들에게도 쉴 새 없이 움직이도록 요구하는 추세다.

보이트는 바그너 성지인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도 아직 입성하지 못했다. 페스티벌 측이 몇해 전 '방랑하는 화란인'의 젠타 역을 제의하면서 "먼저 전신 사진부터 보내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노래 못지 않게 몸매와 연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무대에서 살아남기 힘든 게 요즘 현실이다. 연출자에 따라 주역 가수에게 반나(半裸)차림을 요구하기도 한다. 영화나 뮤지컬처럼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볼거리로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라지만 뒷맛은 썩 개운치는 않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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