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공화국 최대의 스캔들 '정인숙 사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970년 오늘(3월 17일) 오후 10시40분쯤 서울 남산의 한 호텔 스카이라운지.

"제발 나를 놓아주세요. 나를 떠나게 해줘요. 이제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인생을 헛되이 보내면 죄악이에요. 제발 나를 놓아주세요. 또 다시 사랑할 수 있게요…."

영국가수 잉글버트 험퍼딩크의 노래 '릴리스미(RELEASE ME)'가 감미로운 저음을 타고 어두운 실내를 흘렀다. 느리게 오가는 조명 속에서 정인숙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한 40대 남자와 생애의 마지막 춤을 추었다. 당시 호텔 종업원들에 따르면 그녀는 이날 밤 '릴리스미'를 두 번이나 신청해 들었다.

그로부터 20여분 후 정인숙(본명 정금지·당시 25세)은 서울 마포구 합정동 강변도로에서 머리와 가슴에 두발의 총탄을 맞고 숨졌다. 이것이 세칭 '정인숙 사건'의 발단이었고 아직도 사건 전모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권력과 성과 살인범죄 같은 'A급 주제'들이 거의 완벽하게 결합된 이 사건은 그래서 최근까지 소설과 영화, 드라마와 다큐멘터리의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경찰은 사건현장 부근에서 다리에 총을 맞고 신음하던 오빠 정종욱씨(당시 34세)를 범인으로 지목,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러나 19년간 복역하다 지난 89년 출소한 정씨는 "나는 인숙이를 쏘지 않았다. 20대 남자 두 명이 범인이다"라며 자신은 정치적 희생양임을 주장했었다.

당시 세간에는 정인숙과 고위층 인사의 염문설이 파다하게 퍼졌고, 정인숙의 '비밀수첩'에서 발견된 26명의 고위층 인사 명단은 이같은 의혹을 뒷받침했다. 수첩속의 명단은 비록 언론에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세간에는 정치적 살인사건이라는 추측이 무성했다.

지난 91년에는 정씨의 아들이 미국에서 귀국, 지금은 고인이 된 前국무총리을 아버지라 주장하며, 친자확인소송을 제기해 정인숙사건은 다시 세인의 이목을 끌었다. 그러나 이 소송은 당사자에 의해 얼마 후 취하됐다.

당시 이 사건을 에워싸고 '명함조심' '오빠조심'이란 말이 유행어가 되기도 했고, '강변3로'는 정조관념이 희박한 여자를 이르는 시대용어가 되기도 했다.

'정인숙 사건' 더 자세히 보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