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으며생각하며>39.안면기형수술 세계권위 白世民박사 下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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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백세민씨는 마운트 사이나이 의대에서 일반외과 레지던트 과정을마치고 이 부문 전문의 자격을 얻었다.이 과정에서 그가 공부한것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 한가지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현미경 수술을 창시했고 수술용 현미경을 직접 고안한 제이콥슨 교수 아래서 배운 미세수술이다.제이콥슨은 이 대학 병원의 혈관외과 과장직에 있었다.신경외과수술이나 뇌수술이 이 미세수술 기술을 기반으로 삼아 새로운 경지로 발달한다.
백세민 박사는 성형외과 레지던트 과정을 밟을 학교로 당시 미국성형외과학회 회장이던 팔레타 교수가 과장으로 있던 세인트 루이스 대학을 선택했다.白박사는 그땐 이미 미국 외과학계에서 상당한 학문적 이력을 뒷받침 할 수 있었으므로 이 신청은 금방 팔레타 교수에 의해 받아들여졌다.白박사의 말.
『저는 그 후 제 자신 의과대학 교수로서 죽 학생들을 가르쳐오고 있지만 어디 가서 가르칠 때도 그 때 저를 가르친 팔레타교수같은 훌륭한 교수는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학생들한테 들려줍니다.그 분은 우리나라의 명의 허준이나 그를 가르친 유태준처럼 감동적인 분입니다.저는 세인트 루이스대학에서 잘린 손가락 네개를 붙이는 현미경 수술을 했습니다.중서부 미국에서는 처음 이런 수술을 성공시켰다고 신문들이 대서특필해 주는 영예를 안았습니다.팔레타 교수가 용기를 북돋 아 준 덕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하루는 팔레타교수 초청으로 프랑스에서 테지에라는 성형외과 의사가 저희 병원을 방문해 며칠간 제 사무실에서 저와 함께 지냈습니다.그는 대학교수도 아니고 자기의 자그마한 개인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저는 이 사람이 한 일을 듣고 눈이휘둥그레졌습니다.그는 파리대학 해부학 교실에서 시체를 구석 구석 뜯어본 다음 이 뼈는 이렇게, 저 뼈는 저렇게 자르고 맞춰아직 아무도 해보지 못한 안면 기형환자 교정 수술을 해 낸 사람이었습니다.총에 맞아 박살난 경우 그냥 두면 죽게되니까 수술을 감행한다지만 사실 기형환자는 살아가는데 아무 이상이 없는 사람입니다.꼴 좀 낫게 하려고 이런 수술 잘못하다가는 생명을 잃게 하기 십상입니다.저희 세인트 루이스대학 병원에도 이런 환자는 많이 있었습니다.저는 팔레타 교수에게 제게 이런 수술을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허락을 받았습니다.수술대상은 눈이 개구리처럼 흉하게 튀어 나온 여덟살 난 흑인 계집애였어요.』 이 수술은 이 애의 두개골을 깨 얼굴 모양을 바꾸고는 관련된 모든 뼈.신경.근육.혈관.피부를 재구성해야 하는 것이었다.이를 면밀히 준비하기 위해 白박사는 시체해부 연구에 달라붙었다.죽자마자 냉동한 신선한 시체들을 구해왔다.이런 시 체는 약물로 처리한 것이 아니라서 녹이면 체온이 없다는 것이 다를 뿐 산사람과 같다.피도 산 사람 것과 색깔까지 같다.그래서 값은 약물로 처리한 시체보다 열곱이상 비싸다.근무시간을 마치고야 시간을 낼 수 있었다.주중에는 근무시간이 오후11시까지였다.거드는 사람 하나 없이 밤을 새워가며 혼자 인체의 단면을얇게 회치듯 잘라가며 조사했다.토요일엔 햄버거 하나 사서 오후에 그 방에 들어가면 오전2시쯤에야 나와 집에 가 잠깐 눈을 붙이고는 일요일 아침 다시와 하루종 일 계속했다.
『그렇게 시체 18구를 해부해보고나니 뭣 좀 알 것 같습디다.과장에게 「이제 걔 수술합시다.괜찮을 것 같습니다」고 말했더니 프랑스로부터 테지에 박사를 불러와 함께하면 어떻겠느냐고 그분이 묻더군요.걱정 마시라고,내가 하겠다고 당당 히 말했지요.
걔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수술이었습니다.팔레타 교수는 나를 믿고 그 수술을 맡겨 주었습니다.저 같으면 그런 일을 맡길 간덩이가 지금도 없습니다.저는 물론이지만 자기도 해본 적 없는 그런 수술이었습니다.최후로 걔 또래 어린애 시체를 구해 수술 실기를 팔레타교수 앞에서 보여준 다음 수술 스케줄을 잡았어요.
수술 들어가기전에 걔 부모와 그 변호사,과장과 그 변호사,병원당국과 병원의 변호사가 모여 각서와 합의서를 썼습니다.
수술 전날밤 저는 한 잠도 못잤어요.수술실에 들어가니 온 방이 촬영 스튜디오처럼 돼 있었습니다.7시간 동안 수술했는데 한순간도 빼지 않고 여러 각도에 배치된 카메라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촬영하더군요.중서부 미국에서는 그런 수술로는 최초의 것이라며 방영되었어요.지금도 그 테이프는 NBC방송국 아카이브에 보관돼 있습니다.』 백세민씨가 성형외과 전문의 자격을 받자 팔레타 교수는 그에게 세인트 루이스 대학에 남아 자기와 일하기를 권했다.한편 뉴욕의 마운트 사이나이 대학으로부터는 조교수 자리제의가 왔다.白박사의 말을 듣자.
『팔레타 교수는 워낙 유명해 그 밑에 있어봐야 별 재미가 없다고 판단했어요.그래서 마운트 사이나이로 갔습니다.거기서 조교수 하면서 뉴욕의 브롱크스 지구에 있는 돈 많은 재향군인 병원의 성형외과 과장을 겸했습니다.제게 미세수술을 가 르친 제이콥슨교수는 제가 다시 온 것이 반갑다며 자기가 만든 미세수술 연구실을 통째로 저한테 주어 버렸어요.이런 소문을 듣고 제 개인한테 오는 환자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그런데 기형수술은 환자마다 특이합니다.또 막히길래 다시 시체 해부를 시작해야 했어요.』 그는 마운트 사이나이 병원으로 돌아간지 2년만인 서른여섯살에 부교수에 성형외과 주임교수가 된다.미국 의학 신문은 이 사실을 대서특필했다고 한다.이런 젊은 나이의 FMG(foreign medical graduate.외국의대졸업자)가 이런 유명 의과대학의 주임(director)이 되다니,이런 식의 감탄이 기사에 듬뿍 섞여 있었다는 것이다.그는 자기가 병원에서 의사 아닌 다른 직종의 사람들로부터 도움받은 장면을 이야기할 때면 신이 나 목소리가 커지고 자기 이야기 에 스스로 도취되는 것 같다.
***덜구운 고기 못먹어 『뉴욕은 연고자 없는 시체가 많은 도십니다.그런 시체는 병원 냉동실에 정해진 날수동안 보관됐다가그래도 찾아가지 않으면 화장해 보관하게 되죠.마운트 사이나이 병원의 시체실 책임자는 마침 전 뉴욕병원 시체실 직원들 친목단체의 맏형노 릇 하는 사람이었습니다.아일랜드 혈통의 노신사였는데 시체실 사람이라고 하여 그는 매일 병원식당 구석 자리에 혼자 떨어져 점심을 먹었습니다.저는 레지던트 때부터 그에게 다가가 함께 점심을 먹곤 했습니다.무척 다정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지요.그에게 시체를 좀 공급해줄 수 없느냐고 부탁했어요.
그는 제가 필요한 날 언제고 신선한 시체를 필요한 만큼 몇구고 대주었습니다.전 뉴욕의 시립병원들의 시체 보관실로부터 협조를 받지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어요.여러 병원에서 앰뷸런스로 날라 왔어요.5년동안 있으면서 이렇게 해부한 시체가 한 3백구가넘습니다.새 기형 환자가 들어오면 그사람의 특성은 또 다르니까그때마다 새로 연구해 보고서야 수술 계획을 세울 수 있었어요.
밤낮 없이 그러고 산 것입니다.지금 하라면 그렇게 못할 겁니다. 그 바람에 저는 쇠고기 스테이크는 바싹 구운 것 아니면 먹을 수 없게 되었어요.덜 구운 것은 그때의 그 시체들을 연상시켜서요.』 白박사는 미국에 14년 있는동안 80여편의 논문을 발표했다.그는 마운트 사이나이 대학병원에서 개인환자가 퍽 많은의사가 되었다.그렇게 된데는 병원 전화교환수들의 덕도 많이 보았다고 그는 말한다.외부에서 전화가 걸려와 어느 의사와 의논해야 하는지 물으면 교환수들이 무조건 그를 대주는 경우가 많아 그렇게 된거란다.
서른아홉살때 그는 고국의 부모님 건강이 안좋다는 소식을 형제간이라고는 단하나 있는 자기보다 열다섯살 아래인 동생으로부터 듣는다. 『결혼도 미국서 했고,손자 얼굴도 그때까지 못 보여 드렸어요.편찮으시단 소식을 듣고보니 다만 한 두해라도 부모님을모시지 않으면 나중에 제 속이 편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그래서 휴직을 2년 받아서 돌아와 처음엔 경희 대학교에서 가르쳤습니다.그후 몇번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작정했던 적도 있었습니다.그러나 한국에서 살면 병원밖을 나가서도 「일류국민」대접을 받는다는 장점을 차마 버리기가 아까웠어요.』 白박사는 안면교정 수술의 경제적 효과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수술은 한번만 하면 끝나요.다섯살짜리를 수술하면 나머지60년동안을 보통 얼굴이 되어 끄떡없이 살 수 있다는 거죠.평생 약 먹고 병원 다녀야 하는 그런 질병과는 달라요.그렇다고 보면 반드시 그렇게 비싼 수술이라고 할 수도 없 습니다.그렇지만 이 수술은 의료보험이 안됩니다.미국서도 안돼요.병이라기보다단지 추형일 뿐이니까 이걸 고치는 건 어디까지나 미용이라고 볼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턱이 볼에 붙어 있고,코가 이마에 있는 당사자로서는 밖에 나다닐 수가 없지요.가족들도 다른 사람이 알까봐 환자를 방구석에 숨겨 두려고만 합니다.다른 식구 혼사까지 막힌다는 겁니다.이런 환자가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대부분 자 폐증에 걸리지 않으면 타인만 보면 난폭한 짓을 하는 사람이 됩니다.이런 사람이 우리나라에 약 10만명 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펑펑우는 어머니들 이런 환자일수록 가난한 집안에 많은 것일까.안면기형 어린애를 데리고 와 수술비 걱정으로 펑펑 울기만 하는 젊은 어머니 때문에 白박사는 친구들 모임에 나가 모금을 했다.다른 넉넉한 환자들이 이런 얘기를 듣고 생면부지인 어려운 사람을 위해 수술비를 낸 일도 많이 있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까 물론 한 사람의 장래를 구한다는 것이긴하지만,이건 전도사도 아니고,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돈 얘기를해야 하는 신세가 돼 버렸어요.그래도 1년에 겨우 열댓명밖엔 거들 수 없었어요.백병원이 이것을 도와주겠다고 해 여기로 왔어요.해마다 1백명내지 1백50명을 백병원이 돕고 있습니다.』 白박사는 한달에 1백20명 정도의 환자를 수술하고 있다고 한다.요새도 미국으로 다시 오라는 말을 가끔 듣는데 그런 때는『미국에는 나 정도 의사는 허다하지만 한국은 나같은 사람도 할 일이 많은 곳이오』라고 폼 좀 잡고 대답한다는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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