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 명성에 이끌려 왔다가 아름다운 한국문화 알게 됐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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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벨기에 출신의 세계적인 철강학자 브루노 디 쿠먼(51·사진)은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포항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미국 코넬대 등에서 이름을 날리던 그는 2005년 포항공대가 철강대학원을 세우면서 교수로 스카우트돼 왔다. 지금은 영일만 바다의 푸른 빛, 그리고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비롯한 한국문화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있다.

석·박사 과정을 갖춘 세계 유일의 철강대학원은 교수진과 학생의 약 30%가 외국인으로, 모든 수업이 영어로 진행된다. 마침 오늘로 창립 40주년을 맞은 포스코의 지원으로 설립됐다.

학교 관계자들은 “워낙 철강 분야 석학으로 유명한 교수라 삼고초려 끝에 겨우 모셔왔다”라고 귀띔했다. 게다가 포항의 연구실로 그를 찾아가니 두 딸과 아들의 사진으로 벽을 거의 도배하다시피 해놓고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과도 떨어진 채 포항을 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사실 ‘포스코’라는 요소가 매우 컸어요. 포스코는 특히 연구개발에 가장 많은 재투자를 하는 기업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철강대학원도 만든 것이고요. 이런 점을 높이 사서 이리로 오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도 고민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한국에 처음 올 때는 북한 핵 문제 같은 부분도 염려하긴 했죠. 하지만, 막상 와보니 여러 환경이 만족스러워요. 특히 포스코와 포항공대 측에서 저에게 한 번도 말로만 약속을 한 것이 없고, 언제나 솔직하게 저를 대해준다는 점이 좋습니다.”

그는 포항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시내의 큰 길 이름마저 ‘제철로(製鐵路)’인 포항에서 사는 게 아주 행복합니다. 학교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명석한 학생들과 철강에 대한 열정을 불태울 수 있기 때문이죠.”

그는 정년까지 임기를 보장받았으며, 연봉도 여느 대학의 세 배나 된다. 철강대학원 학생들은 월 200만원의 장학금을 받으며, 졸업 뒤 본인이 원할 경우 포스코에 자동 입사할 수 있다.

쿠먼 교수는 고국에서도 정년과 고액 연봉이 보장된 상황이었지만 한 번도 와보지 않았던 도시인 포항을 선택, 이번 3월에 여섯 째 학기를 맞이했다.

그동안 새로운 관심 분야가 생겼다. 한국 문화다.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전문 분야인 철강 재료 디자인이 아닌 한국전통문화와 관련된 서류를 다듬고 있었다. 주한 벨기에 대사관과 함께 올해 가을 브뤼셀에서 열 예정인 ‘연꽃 아래서’란 이름의 한국 전통문화 관련 전시행사 제안서였다.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과 벨기에의 국립 박물관이 참여하는 큰 규모의 전시다.

그는 “유럽에서 동북아시아는 중국과 일본밖에 모른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며 “아마도 벨기에에선 최초로 한국전통문화를 중점 소개하는 기회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전시될 문화재에는 그가 특히 좋아하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도 포함됐다.

“영어 관련 강의는 너무나 훌륭한데도 막상 외국인들을 위한 한국어나 한국문화 강좌는 거의 없더라고요. 왜 그렇죠? 막상 알고 보면 한국이란 참 매력적인데, 그걸 알릴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 것 같습디다.”

그가 지금껏 몸담았던 네덜란드나 미국·벨기에의 대학교와 연구소에는 외국인 교원과 학생을 위한 자국 언어·문화 강좌가 매우 충실했다고 덧붙였다.

아쉬운 게 더 있다. 국제학교가 없다 보니 아이들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서울에도 외국인 학교가 있지만 거의 대학 등록금에 맞먹을 정도로 비싼 수업료가 부담스럽죠. 한국이 진정으로 세계화를 하려면 국제학교를 확충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봅니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은 1년에 두 번 정도밖에 보진 못하지만 그래도 정년까지 포항에 있을 작정이다. 그러면서 설립 3년이 되지 않았는데도 올해에만 벌써 5개의 권위 있는 국제학회에서 학술 발표를 하도록 초청받았다고 자랑했다.

쿠먼 교수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다고 했다. “10년 뒤에는 학술적 성과를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인터뷰해보고 싶네요.”

실제로 연구실 화이트 보드에는 “수고하셨습니다” 등등 그가 배우고 있는 한국어 문장이 적혀 있었다.

포항=전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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