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음감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그의 아름다운 도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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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호 11면

최준(18)군이 30일 콘서트를 앞두고 어머니 모현선씨와 함께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다. 콘서트 수익금(입장료 1만원)은 전액 장애우를 위해 쓰인다. [신인섭 기자]

“준아, 이번에 공연하는 프로그램 중에서 어떤 게 제일 재밌니? 음, 판소리랑 피아노 중에서.”

“피아노.”

낯선 사람들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준이에게 ‘어떻게 하면 대답하기 쉬울까’ 고민하며 질문을 던졌다. 달랑 한 단어이긴 해도 대답이 재깍 튀어나온다. 그런데 준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연습실로 달려간다.

엄마 모현선(46)씨가 당황했다. “얘, 인터뷰하다가 어디 가니?” 피아노 얘기를 해놓고 나니 갑자기 ‘필’이 온 모양이었다. 쫓아간 기자가 “아, 피아노가 치고 싶어졌나 보구나. 한번 쳐 볼래?” 했더니 함박웃음을 지으며 피아노 뚜껑을 연다. 그러곤 마치 무대 위의 연주자처럼 옷매무새를 만지며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한 뒤 의자를 반듯이 꺼내 앉았다. 다음 순간, 그의 손가락에선 예상치 못한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왔다. 슈베르트의 즉흥곡. 건반을 두드리며 그 아이는 낯선 사람과의 만남 때문에 생긴 불안감을 잊고 음악 속에 빠져들었다.

최준. 올해 만 18세. 하지만 대화 능력은 대여섯 살 수준이다. 그렇다. 발달장애 청소년이다. 자폐장애라고도 하는 것, 2급이니까 제법 중증이다. 낯선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고, 옆에서 지적해주지 않으면 대화하는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고등학교 2학년(서울 동성고)인데도 엄마가 옆에 없으면 불안해한다.

그런 준이에게 엄마·아빠만큼 좋고, 웬만한 또래보다 확실히 잘하는 게 있다. 음악. 특히 피아노와 판소리는 수준급이다. 2003년 ‘흥보가’, 2006년 ‘춘향가’ 발표회를 열며 ‘판소리 말아톤’이란 애칭도 얻었다. 30일 오후 3시 서울 남산국악당에서 세 번째 단독 공연을 한다. 이번엔 판소리뿐 아니라 피아노 연주와 협연 등이 어우러진, 훨씬 그럴듯한 콘서트다. 제목은 ‘音, 소리에 빠지다’. 같은 제목의 앨범도 취입했다. 26일 오후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서울 삼청동의 디자인 사무실에서 준이를 만났을 때 조금 전에 나왔다는 따끈따끈한 새 앨범 박스가 한쪽 구석에 놓여 있었다.
 
소리에 울고 소리에 웃다

즉흥곡 연주가 끝났다. 정중히 인사하는 그에게 열렬히 박수를 치며 ‘앙코르’를 외쳐줬다. 어머,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앉는다. 이번엔 캐논 변주곡. 준이와 엄마에게 한 줄기 빛을 던져준 곡이다.

준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1년 늦게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래도 일반학교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손가락을 많이 움직이면 뇌 발달에 좋다고 해서 피아노를 시작했다. 하지만 1년도 못 돼 포기했다.

“같은 음만 계속 치니까 음반이 고장 나 뜯어낼 정도가 되곤 했어요. 바뀌는 선생님마다 도저히 못 가르치겠다며 그만두셨죠.”

그러다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는 함께 갔던 카페에서 들은 피아노곡을 집의 피아노로 딩동댕댕 옮기고 있는 준이를 발견했다. 바로 캐논 변주곡이었다. 다른 능력은 떨어져도 준이가 절대음감을 가졌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됐다. 지금 캐논 변주곡을 능수능란하게 국악 버전, 세마치 버전으로 바꿔 가며 연주하는 준이는 그때 다시 태어난 것이다.

정식 음악 공부는 판소리로 시작했다. 4학년이 되자 고학년 발달장애아를 위한 마땅한 치료 프로그램을 찾기 힘들었다. 준이 부모는 ‘남자 아이는 사춘기 때 에너지를 발산할 거리를 꼭 찾아줘야 한다’는 조언을 듣고 사물놀이를 가르쳐 보기로 했다. 마침 찾아간 선생님은 판소리가 전공이었다. 그때만 해도 몇 마디 단어조차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던 준이에게 판소리를 권했다. 생각지 못한 변화가 나타났다. 생소한 판소리 사설을 공책에 옮겨 적고 가사를 외우며 노래하는 사이 준이는 암기력과 호흡·발음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음악적 재능도 발동했다. 중학교 때 비장애 학생과 함께 겨룬 ‘종로 전국 청소년 국악경연대회’에서 판소리 부문 우수상을 탔다. 준이는 자신감을 얻었다.

많은 자폐장애 아이들이 그렇듯이 준이는 어렸을 때부터 소리에 예민했다. 상점에 가면 보이는 상품이나 진열대를 일일이 두드려 소리의 높낮이를 확인하곤 했다. 지하철이나 장난감 태엽 돌아가는 소리는 귀를 막고 몸을 부들부들 떨 정도로 싫어했다.

반면 프로펠러 돌아가는 모습이나 소리는 좋아한다. 그래서 여름이면 준이를 위해 반 친구들이 일부러 선풍기 근처에 준이를 앉게 했다. 그리고 음악 소리는…. 피아노를 치고 판소리를 할 때면 준이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같다”.
 
마음을 울리는 아이

“말도 제법 잘하고 사람들 앞에 잘 나서는 걸 보면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래서 지난해 병원에서 장애 진단을 다시 받을 때 등급이 바뀔 줄 알았는데…. 똑같더라고요. 겉보기랑 다른가 봐요.”

별로 실망하지는 않았다면서도 그 얘길 하는 준이 아빠 최정돈(50)씨 얼굴에 서운한 기색이 지나간다. 하지만 미대 후배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첫 아이, 아내를 닮아 똘망똘망 자라길 기대했던 아이가 돌이 지나도, 또 1년이 지나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절망감에야 감히 비기랴.

“처음 장애 진단을 받고 나서 몇 년이 지나도록 장애 등록을 해주지 않았어요. 아이에게 ‘빨간 줄’ 긋게 하는 기분, 그거 있잖아요.”

자식이 장애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쉬운 부모가 어디 있을까. 그런 생각 때문에 더욱 고집했던 일반학교 진학은 준이에게 나름대로 효과가 컸다.

“준이처럼 사회성이 문제인 아이는 특수학교보다 일반학교에서 다른 아이들과 부대끼며 배우는 게 참 많은 것 같아요. 물론 학교 측의 이해를 구하고 수업을 방해하지 않게 교실에 가 준이 곁을 지키느라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죠.”

영화 ‘말아톤’의 초원이 엄마는 여기에도 있었다. 준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 바로 엄마 모현선씨다. “엄마가 너무 사랑스러워요”란 말이 그에게 얼마나 기쁨이 되는지 준이는 알까.

그럭저럭 직장생활을 하던 모씨는 준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그만두고 아이의 ‘그림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준이는 4학년이 될 때까지 기저귀가 필요할 정도였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엄마는 교실에서 나왔다. 대신 선생님이 부르면 5분 내에 달려갈 수 있도록 한겨울에도 운동장에서 혼자 종종거리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요즘은 등·하굣길만 챙겨주고 수업 중엔 가끔씩 들르는 정도다.

“학교에 가 보면 대개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어요. 다행인건, 다른 애들도 입시공부
때문에 피곤한지 수업 시간에 자고 있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이젠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여유도 찾았다.

“처음엔 다른 아이들이나 선생님께 미안한 생각뿐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이 아이들도 준이를 통해 좋은 공부를 하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발달장애에 대해 잘 모르거나, 모두 ‘초원이’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직 많아요. ‘이런 아이도 있다’는 걸 서로 배우는 기회가 되겠죠.”
 
함께 부르는 ‘사랑가’

준이는 인복(人福)도 많다. 특히 그의 재능을 인정해주고 더 높은 곳을 향하도록 채찍질하는 판소리와 피아노 선생님은 누구보다 “예쁘다”(준이가 좋아하는 선생님께 하는 표현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준이에게 판소리를 가르쳐온 박지영씨는 “준이는 음악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집중력이 매우 뛰어나다”며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말한다. 준이는 지난달 전국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예
비학교(예술실기 연수과정) 판소리 부문 입학시험에서 비장애 학생들과 겨뤄 당당히 합격했다. 판소리 악보를 보고 즉석에서 조옮김해 불러 보는 시험이었다. 앞으로 1년 동안 이 학교에서 토요일마다 4시간씩 실기와 이론 교육을 받게 된다.

“새로운 목표가 생겼어요. 준이가 대학에 가 음악 공부를 더 체계적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해줄 거예요.” 엄마의 말이다.

사실 돈도 많이 든다. ‘다른 애들은 입시 준비 사교육비로 많이 든다는데’ 하고 버티기엔 적지 않은 부담이다. 판소리나 피아노, 무얼 배우든 준이는 개인 레슨을 받을 수밖에 없다. 중학생인 준이 여동생에겐 그만큼 해주지 못하는데도 힘이 든다. 이번에 앨범을 만들고 콘서트를 여는 것도 한국장애인복지관협회의 후원이 없었으면 엄두도 못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곧 청년이 될 준이에게 목표가 하나 생겼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기쁘다. 준이가 세상 모든 이의 심금을 울리는 소리를 낼 수 있을 때까지, 준이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도전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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