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책읽기] 꼬리를 무는 폭력 … 피로 물든 라틴아메리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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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La Virgen de los Sicarios
살인 청부업자들의 성모

Alfaguara 출판사(1998)
128쪽, 12유로

페르난도 바예호는 특이한 이력을 지닌 작가이다. 자진망명 형태로 멕시코에서 살면서 영화 3편을 제작한 뒤에 영화에서 손을 뗐고, 『나의 형, 시장(市長) 』』(2004년)을 발표한 뒤에는 지난날의 삶을 기록했으니 더 쓸 게 없다며 문학과 결별했다. 이 책 『살인청부업자들의 성모』도 전작들이 그랬듯 폭력과 죽음이 일상사 같은, 마약 카르텔이 지배하는 지옥 같은 콜롬비아 메데인이 배경이다.

이야기는 40대 동성애자 페르난도(내레이터이자 문법학자)와 17살 알렉시스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알렉시스는 가족도, 미래도, 법도 없고 마약밀수업자들과의 계약에 의해 상대를 제거함으로써 목숨을 부지하는 살인청부업자이다. 가난과 타락의 희생자로 태어나 철저하게 애정이 결핍된 그들 대부분이 그렇듯 평소에 라디오를 듣거나 TV를 보는 게 낙이었던 그는 페르난도를 만나면서 죽음의 천사이자 거리의 무법자로 변한다. 그의 피스톨은 라디오 볼륨을 제멋대로 올린 택시기사에게도, 잠을 못 자게 만드는 폭주족에게도 불을 뿜는다. 노이로제가 심한 페르난도를 귀찮게 만드는 것은 모두가 적이다. 페르난도는 자신을 경배하는 소년을 통해 위안을 받으며, 소년의 광기를 목숨을 부지할 가치조차 없는 존재들을 청소하는 행위로 정당화시킨다. 두 사람은 함께 살인청부업자들의 수호신인 성모에게 기도하기 위해 성당을 찾기도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알렉시스가 그들의 최후가 늘 그러하듯, 죽은 자의 수효가 하나 더 늘어난 것에 불과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흔히 라틴아메리카를 언급할 때면 제3세계, 외채, 마약, 부정부패, 폭력 등 어두운 측면을 떠올린다. 이러한 이미지는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 엄연한 현실이며, 이러한 부정적 측면을 관통하는 속성은 관습과 제도처럼 굳어진 폭력이다. 폭력도 다양하다. 특히 이 책에서 보여주는 폭력의 모습은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괴롭히는 단순한 폭력과는 사뭇 다르다. 국가가 국민을, 부자가 가난한 자를, 남자가 여자를, 어른이 아이를 괴롭히는 모든 유무형의 폭력을 넘어선, 폭력이 죽음을 부르고 죽음이 다시 폭력을 부르는 악순환의 폭력이다. 이 이야기는 폭력과 죽음이 짜낸 붉은 핏물로 웅덩이를 이루지만 프랑스나 할리우드 풍의 누아르와는 전혀 다르다. 배신과 복수의 스토리, 철저하게 포장된 등장인물의 능력, 어설픈 선과 악의 대비, 화려하고 인위적인 배경 설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순도 99.9%를 보증하는 콜롬비아의 마약성분처럼 “날마다 죽음을 수습하는 게 일과가 되어버린” 메데인의 현실보다 더 리얼한 이야기는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현실을 묘사하지 않고 거울처럼 보여줄 뿐이며, 독자는 주인공의 차분한 회상과 독백을 직조하면서 폭력이 예술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을 겪게 된다.

이 책이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는 것은 줄거리나 메시지보다는 살아있는 언어의 힘이다. 콜롬비아의 암담한 현실과 미래를 조롱하는 냉소, 주인공의 긴 독백 같은 묘사, 허무와 고독이 짙게 깔린, 깔끔하게 정제된 시적인 언어 말이다. 그리하여 한 편의 에세이 같은 이 책은, ‘가장 고통스런 곳을 때리는 도전적인 산문으로 씌어진, 진지하고 잔혹한 책’(르몽드 지)은 스크린 문자로 각색돼 영화계에서도 절대적인 호평을 받았다.

작가의 독특한 이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작가는 평소 연구서를 통해 다윈의 진화론은 물론이고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싸잡아 비판했으며, 2007년에는 신의 존재를 논리정연하게 부정하는 연구서 『바빌로니아의 창녀』를 내놓기도 했다. 

정창(번역가)

페르난도 바예호Fernando Vallejo

1942년, 콜롬비아 메데인 출생. 작가이자 음악가, 영화제작자, 생물학자이다. 이탈리아와 미국에 머물렀으며, 197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멕시코에 거주하고 있다. 문학작품으로 자전소설인 『시간의 강 』(El rio de tiempo) 시리즈(1986~93) 6편과 ‘로물로 가예고 상’을 수상한 『낭떠러지El desbarrancadero』 (200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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