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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한국현대사>34<김일성명령서>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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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6.25전쟁은 김일성(金日成)과 박헌영(朴憲永)이 공동 결정해 일으킨 전쟁이었다.그동안 김일성과 박헌영 중 누가 전쟁을 주도했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세가지 주장이 대립돼 왔다.
하나는 박헌영의 선동에 의해 전쟁을 하게 됐다는 것이며,다른하나는 박헌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전쟁을 개시했다는 주장이다.또 다른 하나는 김일성과 박헌영의 권력투쟁이 전쟁을 불러일으켰다는 주장이다.이 세가지는 북한의 내부 문서들을 볼 때 설득력이 약하다.
김일성과 박헌영의 권력투쟁이 전쟁을 일어나게 했다는 주장은 북한 내부의 권력 메커니즘을 볼 때 동의하기 어렵다.전쟁이라는체제 자체를 거는 승부수에 이런 분열과 대립이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논리는 성립되기 어렵다.
물론 김일성과 박헌영간에 대립과 갈등이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두사람은 권력의 배분을 놓고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렸다.
그러나 두사람 모두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시켜야 한다는 목표에는의견이 일치했다.
박헌영은 남로당 계열에 대한 지도력과 남한혁명문제에 있어 김일성보다 발언권이 더 강했다.예컨대 스탈린과의 대화에서 남한내첩자 침투 문제와 게릴라규모 등 남한정세에 답변한 것은 김일성이 아니라 박헌영이었다.
김일성은 남한에 대한 정세 인식과 전략 수립에 있어선 박헌영의 주도권을 인정해 왔기 때문에 두사람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서는 「남한해방」인 6.25전쟁의 개시 자체가 불가능했다.
만약 박헌영이 전쟁에 반대했다면,전쟁 개시에 대한 스탈린의 최종 승인을 얻기 전후인 50년 봄 남로당 계열이 대거 남한에파견된 사실을 설명할 수가 없다.당시 남파요원들은 전부 남로당출신이었다.게릴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남로당 출신들은 전쟁이 성공하면 자신의 고향과 생활터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이렇게 볼 때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계열이 전쟁에 반대했을 것같지는 않다.김일성도 남로당 계열의 적극적 도움없이 단독으로 전쟁을 일으키기가 어려웠던 것이 당시 현실이었다. 김일성과 박헌영이 공동으로 전쟁을 결정했음을 입증하는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전쟁개시에 대한 스탈린과 모택동의 승인을얻기 위한 회담에 두사람이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두사람은 비밀방문이든 공개방문이든 스탈린과 모택동을 만나러 갈 때 함께 다녔다.이것은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박헌영이 전쟁을 반대했다면 김일성과 동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다시 말해 전쟁에 반대하는 인물을 스탈린.모택동과의 전쟁결정논의에 굳이 끌어들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김일성은 전쟁이 끝난후 박헌영의 남한정세 인식 등을 문제삼아그를 처단했다.이는 바꾸어 말해 김일성이 박헌영과 협의를 거쳐전쟁을 일으켰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북한의 前외무성 부상이었던 박길룡(朴吉龍)의 증언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50년11월7일 10월혁명 기념일에 북한지도부가 피신해 있던 만포진의 소련대사관에서 연회가 있었다.간부들이 전부 모인 집회였다.이때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여보,박헌영이.당신이 말한그 빨치산이 다 어디에 갔는가.백성들이 다 일어난 다고 그랬는데 어디로 갔는가.당신이 스탈린한테 어떻게 보고했는가.우리가 넘어가면 막 일어난다고 당신이 그런 얘기 왜 했는가」하고 책임을 추궁했다.』 『그러자 박헌영이 있다가 불쑥「아니,김일성 동지.어찌해서 낙동강으로 군대를 다 보냈는가.서울이나 후방에 병력을 하나도 못두었는가.그러니까 후퇴할 때 다 독안에 든 쥐가되지 않았는가.그러니 다 내 책임은 아니다」고 반박했다.』 여기에서「다 내 책임은 아니다」라는 박헌영의 발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즉 이 말은 전쟁에 대한 두사람간의 합의과정에서 김일성 자신이 주도적 역할을 했고,박헌영에게 남한에 대한 정세를 자문하자 박헌영은 이에 대해 김일성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낙관적인 대답을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전쟁이 두사람간의 충분한 논의과정을 거쳐 결정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다른 증거로는 전쟁 기간중인 50년 10월 인민군내의 당.정치.사상사업을 총괄하는 총정치국을 창설해 초대 정치국장에 박헌영이 취임하면서 주요 명령을 김일성과 공동으로 내린 점을 들 수 있다.절대 비밀로 분류돼 있는 50년 10 월 14일자「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에는 김일성과 박헌영의 도장이 찍혀있다. 이 명령서에는 『첫째 일보도 퇴각하지 말라! 우리에게는 이 이상 퇴각할 곳이 없다.
조국과 인민은 자기의 무장력인 인민군대가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다하여 진지를 사수할 것을 요구한다.둘째 우울분자.요언분자는 전투에서 위험한 우리의 적이다.부대내에 혼란을 일으키며 무기를 던지며 명령없이 전투장을 떠나는 자들은 직위 여하를 불문하고 모두 다 인민의 적으로써 그 자리에서 사형할 것』이라고 돼 있어 후퇴하던 상황의 위기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박헌영이 이처럼 인민군내에서 최고사령관 다음의 군사적 직책을맡아 전쟁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한 것은 이 전쟁이 김일성과 박헌영이 공동으로 주도한 전쟁임을 입증하는 것이다.중국군 참전 이전 모택동에게 보낸 지원 요청 편지 역시 김일 성과 박헌영의공동명의로 돼 있었다.또 북한측이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을 빼앗긴 직후인 50년9월 29일 스탈린에게 긴급원조를 요청하는 편지 또한 마찬가지였다.
역으로 전쟁의 발발 이전은 물론 50년6월 이후 스탈린과 모택동이 북한측에 보내는 전문도 거의 대부분 김일성과 박헌영이 공동수령자로 돼 있었다.북한주재 소련대사인 스티코프를 통해 모스크바에서 내려보내는 많은 지시 역시「김일성에게 전달하라」는 것보다는 대부분이「김일성과 박헌영에게 전달하라」는 것이었다.
***電文도 공동수령 모스크바와 북경도 이 전쟁이 김일성의 전쟁이면서 박헌영의 전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전쟁중 두사람의 역할에 대해서도 두나라는 거의 비등하게 취급했다.수상(김일성)의 편지에 부수상 겸 외무상(박헌영)이 대부분 공동명의로 서명하는 것도 이행하기 어려운 일이지만,외국의 원수들이 다른 나라의 정부수반에게 공식문서를 보낼 때 계속 2인자와 공동수신하도록 보내는 것도 정상은 아니다.
이는 외부의 눈에도 김일성과 박헌영이 전쟁을 공동수행하는 것으로 비쳐졌음을 의미한다.결국 박헌영과 김일성,크게는 남로당과북로당,또 한국의 全공산주의자들에게 이 전쟁은 공동의 결정으로치러지는 것이자 공동의 혁명이었고 목표였던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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