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만은 꼭!] 과거를 그리는 史家는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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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며칠 사이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을 몇백년 뒤 역사가가 기록한다면 어떻게 묘사할까, 라고 생각한 국민이 많았을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그의 희곡에 맞춤한 한마디 말을 남겼다. "친구들이여, 이것이 무슨 나라란 말인가?" 21세기 들어 발생한 테러와 전쟁만 떠올려 보아도 200~300년 후의 역사가들이 우리 세대에서 무엇을 의미 있다고 추려낼지 궁금해진다. 미국의 역사학자 존 루이스 개디스(63.예일대 사학과 석좌교수)가 제기한 논점도 바로 이것이다. 역사의 풍경을 관찰하는 역사가는 과거를 어떻게 그리는가.

개디스와 우리 앞에는 이미 많은 이가 공감한 본보기가 있다. 에드워드 핼릿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와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를 위한 변명'이다. 역사를 진보의 기록으로 만드는 능력이 우리가 이성으로 판단한 가치를 통해 이뤄진다고 믿은 카나, 역사학을 '시간 속의 인간에 관한 학문'이라 보고 적극적인 선택과 선별작업을 강조한 블로크 모두 20세기를 대표하는 역사학 입문서를 남겼다. 하지만 개디스가 보기에 두 선구자는 뉴턴의 선형 과학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 역사책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개디스는 "예술과 과학 중간의 어디쯤에 존재하는" 역사가를 자임하며 2002년 세련된 역사 교재 '역사의 풍경'을 내놓았다.

개디스는 현대 역사가의 초상으로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1818년 작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를 골랐다. 우리를 등지고 선 남자는 먼 풍경에 몰입하지는 않고 그것 위에 서 있다. "중요함과 하찮음 간의 긴장, 스스로 크게도 느껴지고 작게도 느껴지는 방식."그 속에서 방랑자는 안개 속을 뚫고, 경험을 추출하고, 사실을 '묘사'하려는 결단력과 경외감이 결합된 호기심을 보여준다. 그 호기심은 "과학적 감각인 것만큼이나 예술적 상상력"이 넘치는 것이다. 과학자이면서 예술가인 역사가는 과거의 풍경을 묘사해 일상에서 우리를 들어올려 더 넓은 시야를 드러내준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부터 우디 앨런의 영화까지 폭넓은 인용을 자랑하며 역사를 이야기한 개디스는 역사가와 역사란 학문의 필요성을 이렇게 말한다. "역사가들 사이에서, 그 다음은 사회 내에서, 그리고 억압과 해방이란 양극 사이에서 최적의 균형을 이루는 것." 방랑자는 희뿌연 안개 속에서 과거를 또는 미래를 바라보며 우리를 억압하는 동시에 해방하는 어떤 상태를 생각하고 있으리라는 것이 개디스의 그림 해석이다.

개디스의 책은 우리의 눈길을'한국사의 풍경'으로 끌어온다. 역사, 역사가, 역사 교육은 중요하다. 오늘의 우리 현실이 역설적으로 왜 역사의식이 소중한가를 웅변한다. 개디스는 "우리가 매일 (역사의) 억압과 해방의 긴장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지혜와 성숙, 삶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쪽으로 걸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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