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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FTA와 일본의 배타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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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일본인은 원래 지역 특산품을 좋아한다. 최고급 벼 품종인 고시히카리가 대표적이다. 개량을 거듭해 만들어낸 이 품종은 밥을 하면 차지고 기름져 일반 품종보다 2배 가까이 비싸다. 이 품종 재배에 적합한 서북부 니가타 지방은 이 쌀로 빚어낸 니혼슈(청주)의 명산지로 꼽힌다. 인형 하면 규슈 지방의 하카다닌쿄를 가장 알아주는 식이다. 단순한 우동·메밀국수 가게가 대를 이어 번창하는 것도 어느 지방에서 누가 만들었느냐를 중시하는 일본인 특유의 문화 때문에 가능하다. 이런 일본인의 정서는 판매 무대를 글로벌 시장으로 하고 있는 공산품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기능이나 가격에 관계없이 전자제품도 일본 땅에서 일본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전기·전자 제조회사 샤프는 제품 광고에서 이런 일본인의 마음을 잘 파고들고 있다. 샤프의 초박막 액정(LCD) TV를 선전하는 광고에는 빈센트 반 고흐의 명작 ‘해바라기’가 등장하고, 일본의 ‘국민 배우’ 요시나가 사유리(吉永小百合)가 동원된다. 요시나가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배우”라고 말했을 만큼 일본인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다. 요시나가는 고흐가 걸었던 프랑스 남부 아를르의 해바라기 밭을 걸으면서 “아름다운 일본의 액정, 명화처럼 벽걸이형으로”라고 말한다. 전자제품을 마치 어느 지방 무슨 특산품 하는 식으로 광고하고 있는 것이다. 샤프가 소비자에게 각인시키고자 하는 것은 ‘메이드 인 재팬’이다. 소비자는 전자제품 매장에서 아예 “샤프 하타케야마 모델 주세요”라고 주문한다. 일본 중부 미에(三重)현 하타케야마공장에서 만든 제품을 달라는 뜻이다. 일본 내 공장에서 일본 기술로 일관생산 체제로 만든 제품인 만큼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삼성은 지난해 일본에서 운용했던 개인 대상 인터넷 판매 시장에서 철수했다. 삼성의 한 간부는 “삼성 로고가 붙은 제품으로는 일본인의 마음을 결코 열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액정 TV 분야 세계 1위를 차지할 만큼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TV나 냉장고·컴퓨터는 완제품이기 때문에 로고를 달아야 했고, 이는 전자제품의 맹주라는 일본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일본 시장의 특성을 절감하고 있는 삼성은 소프트뱅크에 공급하는 휴대전화에 기대를 걸고 있다. 삼성 로고는 우연히 보이도록 은근히 표시한다. 최근 모델에는 폴더를 열어야 로고가 나오도록 더 신경을 썼다. 현대자동차가 고전하고 있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현실이 이쯤 되면서 일본에서는 완제품으로 팔리는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이 “김치와 컵라면밖에 없다”는 자조가 절로 나온다. 일본은 김치조차 요리법을 일본인 입맛에 맞게 바꾼 ‘기무치’로 만들어내 원조 김치의 아성을 흔들고 있다. 한국인의 상징 같은 김치조차 일본화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재개를 앞두고 있다. 이런 일본인의 ‘마인드’를 이해하지 못하면 협상은 동상이몽 끝에 ‘불평등 협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일본은 틀림없이 “네가 한 개 내놓으면, 나도 한 개 주마”라는 식의 겉으로 보면 대등한 협상을 주장할 것이다. 이런 협상의 결과는 뻔하다. 1억3000만 명에 육박하는 일본인 한 명 한 명이 모두 ‘비관세 장벽’으로 버티고 있는 한 FTA를 맺어도 한국이 일본에 팔 수 있는 상품은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일본은 경제산업성이 대형 기업들을 뒤에서 주무르고 있다. 소니가 샤프로부터 액정 패널을 조달받고, 반도체·휴대전화 회사들이 합종연횡을 벌이고 있는 것도 모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하는 일본 정부의 훈수와 작전에 따른 것이다. 한·일 FTA를 결코 낙관할 수 없는 이유들이다.

김동호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