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명령으로 총선 … 막 내린 ‘부탄 왕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지난해 미국 외교 전문지인 ‘포린 폴리시(FP)’는 전 세계 독신 지도자 중 가장 매력적인 배우자감 5명 중 한 명으로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추크(28·사진) 부탄 왕을 꼽았다. ‘꽃미남 총각 국왕’으로 유명한 그는 미국 명문 사립학교인 필립스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국제관계와 정치학을 공부했다. 왕세자 시절이던 2006년 6월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의 즉위 60주년 행사에 참석했을 때는 젊은 여성 팬들이 그를 둘러싸는 소란도 빚어졌다. 그해 12월 아버지인 지그메 싱기에 왕추크의 뒤를 이어 새 국왕이 된 그는 “절대군주제를 버리고 입헌군주제로 바꾸겠다”고 국민 앞에서 약속했다. 아버지가 민주화를 위해 펼쳤던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마침내 그는 그 약속을 지켰다.

히말라야 산맥에 자리 잡은 ‘은둔의 왕국’ 부탄이 24일 사상 첫 총선을 치렀다. 역사적인 총선이 실시된 이날 아침 전통의상을 곱게 차려입은 부탄인들이 전국 180여 곳에 설치된 투표소 앞에 줄을 섰다고 로이터통신 등 외신이 보도했다. 투표소가 문을 열기 전부터 친구와 줄을 선 교사인 탄딘 왕모(28·여)는 “부탄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투표를 할 수 있게 돼 설렌다”고 말했다. 체왕 데마(65·여)는 투표하기 위해 14일 동안 600㎞를 걸어 고향인 트라시양체를 찾았다고 ‘부탄 타임스’가 전했다.

이날 실시된 선거를 통해 47명의 하원의원이 선출된다. 상원의원 선거는 두 달 전에 실시됐다. 하원 총선은 오전 9시에 시작돼 오후 5시에 끝났다. 총유권자는 국민(63만여 명)의 절반가량인 31만8000여 명으로 이들 중 61%가 투표에 참여했다. 왕족 일가와 불교 승려는 선거 중립을 지키기 위해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번 선거로 하원이 구성되면 100년여 계속돼 온 부탄의 절대왕정은 막을 내리게 된다. 입헌군주제의 민주주의 국가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신은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이 아닌 왕의 결정과 명령에 따른 것이다. 부탄의 두 정당인 국민민주당(PDP)·부탄통일당(DPT)과 국민은 오히려 왕정을 선호한다. 변화가 두려워서다. 그럼에도 민주화를 향한 도전에 나선 것은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왕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로이터와 AP 등은 전했다.

4대 국왕 지그메 싱기에 왕추크 국왕은 2001년부터 일상적인 행정권을 각료 위원회에 넘기고 민주 개혁안을 담은 헌법 개정안 초안을 공개했다. 2005년 12월에는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정부에 권력을 이양하겠다”고 밝혔다. 이듬해 즉위한 현 국왕도 그 뜻을 이어받았다.

부탄 왕조는 1907년에 들어섰다. 1910년 영국에 외교권을 넘겨줬고 49년에는 인도와 비슷한 형태의 조약을 맺어 중국의 위협에서 벗어났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400달러(약 140만원)에 불과할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다. 그러나 지난해 영국 레스터대가 조사한 ‘세계 행복지수’에서 부탄은 8위를 차지했다.

하현옥 기자
▶ 지구촌 국제뉴스 - CNN한글뉴스 & Live Radio AP월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