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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25. 배고팠던 일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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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본 활동 당시 찍은 화보 사진.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고 계획적인 국민의 습성과 문화, 우리보다 훨씬 앞선 엔터테인먼트 산업, 그리고 유명 배우나 배우들도 공연할 수 있는 지방 소도시 문화시설. 이른바 선진 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던 일본은 내게 세계로 가는 첫눈을 뜨게 해준 곳이었다.

특히 지역마다 훌륭한 공연장이 있었다. 도쿄에서 했던 공연을 전국 각 공연장에서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엄청나게 부러웠다. 도쿄에서 한 공연은 대부분 전국 순회 공연으로 이어졌다. 나도 일본 전국을 도는 순회 공연에 몇 차례 참가했는데 그때마다 지역 공연장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600~700석 규모의 작은 공연장도 있었지만 시설 면에서 결코 대도시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웬만한 도시에는 그런 문화공간이 있었다. 당연히 그런 곳에서의 공연은 대도시에서와는 또 다른 교감과 감동을 주었다. 국립극장을 제외하고는 변변한 공연장이 없었던 당시 우리나라 현실을 떠올리며 몹시 부러워했다. 역시 앞선 나라였다.

하지만 그런 몇 가지를 빼고 일본은 여러 가지 면에서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나라였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음식이었다. 음식이 입에 맞고 안 맞고를 떠나 일단 양이 너무 적어서 기가 막혔다. 건강하고 식욕이 왕성하던 20대 초반 시절이니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플 지경이었다. 그런데 식사 시간에 나오는 음식이라고는 반 공기도 채 안 되는 밥과 된장국, 생선 반 토막, 김 몇 장, 장아찌 서너 조각이 전부였다.

특히 식사 초대를 받았을 때는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두세 술만 뜨면 금세 밥 공기가 바닥을 보이니 창피하기도 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센베이라는 쌀과자와 생선살로 만든 가마보코를 사 먹으며 모자란 양을 채웠던 기억이 난다. 물론 이런저런 배려도 있었다. 어느 공연장이든 대기실에 차와 과자를 준비해두었다. 또 식사 시간이 되면 출연진과 스태프 모두에게 도시락을 제공했다. 하지만 이 역시 양이 적어 나는 늘 부족함을 느꼈다.

일본 생활에도 서서히 익숙해졌다. 혼자 돌아다니고, 쇼핑도 할 수 있을 만큼 일본어 실력이 쌓였다. 동남아 국가로 공연하러 가기도 했다. NHK 방송 출연과 공연을 병행하며 2개월마다 비자를 갱신하기 위해 홍콩·대만·필리핀 등으로 나가야 했던 것이다. 그곳에서 2~3일 또는 4~5일 정도 공연을 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에드 마스터즈의 주선으로 대만과 필리핀에서는 미군 부대 클럽에서 공연을 했지만 홍콩에서는 주로 힐튼호텔 클럽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러는 사이 나는 점차 더 넓은 세계를 향해 눈 뜨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홍콩은 영국령이었기 때문에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 사람들이 모이는 국제도시였다. 일본과 또 다른 서구문화도 만나게 된 것이다. 내 관심 또한 보다 크고 넓은 곳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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