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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창극칼럼

대통령 자리로 올라서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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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명박 대통령을 찍은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총선에서 한나라당을 찍지 않을 것이라는 여론조사가 있었다. 그런데도 정신 못 차린 한나라당은 아예 대놓고 권력투쟁으로 들어갔다. 취임한 지 이제 겨우 한 달인데 이렇게 지리멸렬할 수 있는가. 대통령의 정치적 리더십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고 있다.

대통령에게는 두 가지 역할이 있다. 하나는 이 나라 전체를 대표하는 국가원수의 역할이요, 다른 하나는 행정부를 이끌어 가는 행정수반이라는 역할이다. 후자가 나라 살림을 잘 꾸려가고 경제를 일으키는 기능적·관리적 역할이라고 한다면 전자는 이 나라를 대표하고, 모든 국민을 하나로 만드는 상징적 역할이라 할 수 있다.

취임 후 이 대통령이 보여준 언행은 주로 행정수반으로서 기능적인 대통령 모습뿐이었다. 그가 자주 강조한 것은 공무원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언급은 “규제를 없애라, 전봇대를 뽑아라, 국민의 머슴이다. 국민은 힘들어도 공무원 봉급은 나간다”는 등 공무원 행동규범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직원들의 나태와 무책임을 꾸짖는 CEO나, 소소한 일까지 챙기는 공무원주식회사의 사장 같아 보였다.

그가 강조한 또 하나의 문제는 경제였다. “라면값을 챙겨라, 오일 쇼크 이후 최대 위기가 온다”는 등 경제에 관한 언급이다. 공무원들을 독려하고 경제 살리기에 애쓰는 것이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위기는 어디서 온 것일까.

지금 불만의 초점은 인사 문제요, 공천 문제요, 국정의 방향 문제로 보인다. 이러한 문제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는 대통령이 국가 수반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데서 온 것 같다. 대통령이 이 나라의 유일하고도 독립적인 국가 지도자라는 점을 간과한 탓이기도 하다. 인사 문제만 해도 그렇다. 비록 대통령이 어떤 지역의 전폭적인 지지로 당선됐다 해도 당선된 후에는 모두의 대통령이다. 장·차관 등 행정부 인사에서 특정 지역이 소외되었다는 말들이 무성하다. 만일 그쪽 사람들을 의식적으로 더 배려했더라면 지금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계층 문제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은 부자와 빈자, 노조원과 경영자, 월급쟁이와 오너 모두의 대통령이다. 돈 많은 사람들만 장관이 됐다는 말이 나와서야 되겠는가. 종교도 편중돼서는 좋을 것이 없다. “믿음·소망·사랑, 그중의 제일은 ‘소망’이니라” 라는 패러디까지 나돌고 있다. 대통령 자리는 지역, 계층, 당파, 종교를 초월한 통합의 상징이어야 한다.

공천이란 본래 소리가 나게 되어 있다. 가장 적나라한 생존투쟁이 벌어지는 곳이 정치판이다. 개인 이해득실이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된다. 이렇게 이해를 좇는 무리들에게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권력으로 누르든가, 명분으로 이끌든가 둘 중 하나다.

그러나 힘으로 누르던 시대는 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을 어떻게 끌고 가야 하는가. 대통령은 그런 무리들이 따라올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대통령이 정파와 계파를 초월할 때 힘을 얻는다. 사적인 인연이나 개인의 이익을 떠날 때 카리스마가 생긴다. 대통령이 정파를 초월하겠다는 소신을 가진다면 굳이 한나라당의 과반수 여부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색깔인사들의 문제만 해도 그렇다. 법이 정한 임기를 무시하고 색깔인사라고 무조건 쫓아낼 수는 없다. 대통령이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법을 수호하려 할 때 정통성이 생기는 것이다. “법이 색깔보다 우선이다”라는 한마디만 했어도 대통령의 위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경제 역시 열정이나 열심만으로는 안 된다. 경제 운용 능력이나 관리 능력만으로도 안 된다. 아무리 애써도 방향이 잘못됐다면 허사다. 국가의 수장으로서 미래의 큰 그림을 제시하고 원칙과 방향만 정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대통령은 존재함으로써 가치가 있는 그런 자리다. 존재 자체로 정의를 기대하고, 평화를 가져오고, 꿈을 주는 그런 자리여야 한다. 그의 말 한마디에 감동이 있고, 그의 손길 하나로 위로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에 의해 나라의 이미지가 바뀐다. 그가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나라의 미래가 달라진다. 이 대통령은 지금까지 몸을 아끼지 않고 나라 살림을 열심히 하려는 행정수반의 모습은 충분히 보여주었다. 이제는 국가수반의 위치로 올라가 현실의 자질구레함을 뛰어넘어 모두가 이룩하고자 하는 나라의 상징이 돼야 한다.

문창극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