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의 친구들 '계속 웃겨주길 바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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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예능 버라이어티쇼의 최강자로 군림하는 MBC ‘무한도전’이 4월 초 100회를 맞는다. ‘대한민국 평균 이하’를 자처하는 여섯 예능인의 유쾌한 ‘리얼 성장쇼’. 한 편의 시트콤처럼, 다큐멘터리처럼 카메라 안팎을 넘나드는 이 실험적인 예능 프로의 막후 지휘자 김태호 PD가 ‘무한도전’의 무한도전기를 털어놨다.

사생활과 캐릭터 얽혀 빚은 '리얼 성장쇼'

MBC-TV 주말 버라이어티쇼 ‘무한도전’은 양극단의 평가를 달린다. 어떤 이에겐 ‘자기들끼리 모여 낄낄대는, 한심한 전파 낭비의 표본’이다. 그런데도 올 초 시청률 30%를 넘어서며 ‘국민 버라이어티쇼’라는 별칭까지 들었다. 확실한 것은 보던 사람이 더 재미 있게 본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정준하가 촬영 시작 시간에 집착하는 것은 그들의 지각을 소재로 한 ‘일찍 와주길 바래’의 전사(前史)를 알아야 웃긴다. 말하자면 ‘무한도전’엔 고유의 문법이 있다. 이 문법을 모르면 이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

“제가 맡은 게 2005년 가을인데, 그때만 해도 ‘토요일’이라는 버라이어티쇼의 한 코너였죠. ‘무모한 도전’이란 이름으로 전철과 달리기 시합을 하고 목욕탕 물을 푸고 그랬는데, 몸개그란 게 그때그때 재미있긴 해도 연속성이 없잖아요. ‘무리한 도전’이란 이름으로 스튜디오 안에 들어오면서 멤버들의 캐릭터를 끌어내기 시작했어요. 캐릭터가 자리 잡으면서 이듬해 5월 독립했죠.”

캐릭터는 서사와 연결된다. ‘반장’ 유재석은 말 잘하는 리더다. ‘악마의 아들’(요즘은 ‘하찮은 형’) 박명수는 유 반장을 질시해 호시탐탐 반장 자리를 노린다. ‘돌아이’ 노홍철은 외계에서 온 듯한 4차원 개그를 남발한다. ‘어색한 뚱보’ 정형돈은 튀는 멤버들 사이에서 설 자리를 못 잡는다. ‘상꼬마’ 하하와 ‘3인자’ 정준하까지 얽혀 이 서사는 굴러간다. 미국 드라마 ‘프렌즈’나 ‘섹스 앤 더 시티’처럼 각각의 캐릭터는 자신에게 동화되는 팬층을 거느렸다.

여기까지 보면 ‘무한도전’은 시트콤이다. 그런데 시트콤이 아닌 것은 그것이 ‘리얼(real)’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리얼하게 뛰고 구르고 넘어진다. ‘모내기 특집’ 땐 빗속에서 논두렁을 굴렀고, ‘무인도 특집’ 땐 필리핀의 외딴섬에서 야자열매를 땄다. 패션쇼 무대에 실제로 서고, 댄스스포츠 경연에 실제로 출전했다. 하지만 ‘무한도전’이 국내 최초 리얼 버라이어티쇼인 이유는 행동이 아니라 캐릭터에서 비롯한다.

“박명수씨는 실제로도 유재석씨에 대해 샘내는 면이 있죠. 하하와 정형돈은 실제 어색해하던 사이였고요. 오랫동안 같이 작업하면서 서로의 관계를 알게 되니까, 거기에 카메라를 들이대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지각 때문에 녹화가 늦어지는 것을 차라리 특집으로 구성해 보자 해서 ‘빨리 와주길 바래’를 했고, ‘깨워주길 바래’ ‘하하와 정형돈의 친해지길 바래’가 호응을 얻으면서 사생활에 더 밀착하게 됐죠.”

처음은 순탄치 않았다. 녹화 사이사이 멤버들 간의 사사로운 정담을 그대로 내보낸 게 때로는 시청자의 거부감을 불렀다. 무엇보다 출연자들이 부담을 많이 느꼈다. “하하가 ‘버릇없다’는 댓글에 의기소침해할 땐 정말 미안했죠.” 이제는 티격태격하는 모습들이 익숙하다 못해 진부하기까지 할 정도니, ‘무한도전’ 참 많이 걸어왔다.

시청자 감정이입 끌어내는 '자막 신공'

그런데 리얼리티는 원래 다큐멘터리의 몫이지 않나. 드라마나 영화와 달리 다큐멘터리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찍어 영상화한다. 예능 프로에서 이는 ‘몰래카메라’를 통해 실현돼 왔다. ‘몰카’ 덕분에 시청자는 별세계의 연예인이 실제론 어떤 모습인지 엿볼 수 있었다. 이에 비해 ‘무한도전’은 촬영 중이란 걸 드러낸 상태에서 그들의 일상을 찍는다. ‘외딴섬에서 1박2일’이라는 포맷만 설정됐던 ‘무인도 특집’이 대표적이다.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다 생각이 나아간 거예요. 로빈슨 크루소가 됐을 때 멤버들이 어떻게 행동할까 본 거죠. 촬영본을 편집하다 보니까 인간의 생각이 진화하는 게 보이더라고요. 협동을 하고, 도구를 이용하고, 수확의 기쁨을 맛보고, 강자가 약자를 배려하고. 포맷 안에서 리얼리티를 포착한다고나 할까.”

그렇게 포착한 것들을 김 PD는 자막으로 ‘해설’한다. ‘무한도전’이 바꿔놓은 예능 프로의 제작 기법 중 하나가 자막을 통한 연출자의 개입이다. 김 PD는 이를 “개입이 아니라 감정이입”이라고 설명한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말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출연자의 심리를 속속들이 알 순 없으니까요. 사람들이 화면을 보면서 ‘이럴 것 같다’고 느끼는 데 초점을 둬요. 시청자와 같이 즐겁게 놀고 싶은 기분이라고 할까요.”

그렇게 시청자는 빨려 들어갔다. 바나나를 놓고 벌이는 식탐 경쟁에 배꼽을 잡고 웃었다. 꿈에 그리던 이영애를 만난 날 몸 둘 바 몰라 하는 노총각들을 비웃었다. 그러다 불쑥 ‘웃기는 것 빼고 다 잘한다’고 자조하는 정형돈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거성’ 박명수가 욕심 따로 능력 따로인 게 안쓰럽게 다가왔다. 별세계 연예인들이 일상의 친구인 양 느껴지게 된 것이다. 그것이 김 PD가 생각하는 ‘재미’의 본질이다. “웃음도 중요하지만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압권이 댄스스포츠 경연대회다. 시청자가 매주 벌어지는 에피소드에 홀려 있는 사이 출연자들은 화면 바깥에서 ‘거사’를 채비하고 있었다. 기초 스텝을 배우기 시작, 80일을 연습한 끝에 경연대회에 출전한 것이다. 몸치들의 좌충우돌과 대회 당일 화려한 모습을 교차 편집한 방송분은 그간의 치열한 도전 과정과 감탄할 만한 성취를 낱낱이 보여줬다. 최선을 다하고 부끄럼 없이 돌아서는 모습은 뭉클한 감동마저 안겼다. 처음 배운 악기를 틈틈이 연습해 팬들 앞에서 감사 공연을 펼친 지난해 말 ‘땡큐 콘서트’ 역시 찬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톱스타들의 엎치락뒤치락하는 일정을 감안하면 더욱 놀라운 프로젝트다. 치밀한 계획과 계산 없인 불가능하다. 짧게는 몇 주, 길게는 1년을 내다보는 장기 기획은 ‘무한도전’이 앞서간 또 하나의 실험이다.

“올 연말까지 큰 줄기는 다 잡혔어요. 요즘도 8개 기획을 동시에 돌리느라 정신이 없어요. 길게 잡아가면서 그 속에서 성장하는 것을 보여주는 컨셉트죠.”

치밀한 장기 기획으로 예능프로 새 장 열어

성장은 카메라 안팎에서 진행된다. ‘무한도전’ 서사 속의 캐릭터도 성장했지만, 실제 출연자들도 성장하고 변한다. 하하는 군대에 입대했고, 박명수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 ‘무한도전’은 그 변해 가는 현실마저 서사 안에서 해결하려 한다. 하하의 빈자리를 당분간 내버려 두는 것도, ‘인도 특집’ 이후 사이가 틀어진 정준하와 노홍철을 관조하는 것도 ‘무한도전’이 결국 이들의 ‘리얼 성장쇼’라서다.

“요즘은 5명이 그릴 수 있는 변수를 외부로 확장해 볼까 생각 중이에요. 예컨대 서른한 살 된 멤버의 고민을 실제 서른한 살짜리의 고민과 연결해 보는 거죠. 시청률이요? 조금만 떨어져도 인터넷에선 ‘급락’ ‘폐지설’ 등 난리인데, 저희는 크게 신경 안 써요. 시청자층이 확대되면서 서비스해야 할 층이 넓어진 게 오히려 고민이죠.”

생각 이상으로 커진 것, 그것이 요즘 ‘무한도전’이 직면한 과제다. MBC의 ‘킬러 콘텐트’로서 헤아려야 할 회사 입장도 있고, 외부에서 손짓하는 출연 제휴도 만만찮다. 무엇보다 ‘리얼 버라이어티쇼’라는 포맷이 예능 프로 전체에 일반화되면서 ‘무한도전’이 식상하게 느껴질 위기에 처했다. 그것에서 벗어날 책임조차 ‘무한도전’과 김 PD에게 있다.

“외부에선, 예컨대 KBS ‘1박2일’과 저희를 비교하는데요, 전 그게 비교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른 프로들은 우리를 좇아서 오고 있잖아요. 우리가 계속 나아가야지만 그들도 뒤따라올 수 있단 뜻이죠. 물론 우리가 하는 모든 게 새로운 건 아니에요. 다만 입던 옷이라도 다른 사람이 입으면 달라지는 것처럼, 기존 포맷이라도 새로움을 입히고 싶어요. 그런 면에서 우리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어요. 출연자들도, 저도.”

글=강혜란 기자 사진=신인섭 기자 theother@joongang.co.kr

▶ 기사 전문은 23일자 중앙SUNDAY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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