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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구의 역사 칼럼] 불가해한 사랑의 전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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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호 39면

꽃피는 봄이 왔으니 사랑 얘기를 한번 해 보자. 조선시대 모든 간통은 사랑이었다. 혼인이라는 제도 안에 들어오지 않는 남녀관계는 모두 간통으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조선 세종 5년(1423) 9월 25일 대사헌 하연(河演·1376~1453)은 은밀히 세종에게 주위를 물려줄 것을 청했다. 그러고는 관찰사를 지낸 이귀산의 부인 유씨와 지신사(知申事·뒷날 承旨) 조서로(趙瑞老)가 간통을 했으니 국문(鞫問)을 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보름 뒤 유씨 부인은 참형(斬刑)에 처해졌고 조서로는 영일로 귀양 갔다. 어찌 된 이야기일까?

유씨 부인과 조서로는 본래 먼 친척 사이였다. 유씨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여승이 되었는데, 친척인 조서로 어머니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조서로가 14세가 됐을 때 이들의 사랑은 시작됐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물론 ‘사(私)’라고 표현되어 있다. 조서로의 어머니는 이때부터 유씨를 미워했다. 유씨는 다시는 그 집에 갈 수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유씨는 환속하여 이귀산에게 시집갔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조서로가 귀산의 집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귀산은 늙었지만 유씨를 몹시 사랑하여 친척이라며 찾아오는 조서로를 늘 후하게 대접했다. 심지어 침실로 맞아들여 술자리를 함께하고 유씨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기도 했다. 또 좋은 말(馬)을 주기도 했다. 그야말로 성심껏 대해 주었다.

“목복(木卜)의 집에서 만나 이 울울하게 맺힌 정을 풀기 바란다.” 이는 유씨가 몰래 조서로에게 보낸 쪽지 편지 내용이다. 여기서 ‘목복(木卜)’은 ‘박(朴)’자를 풀어 쓴 것이다. 조서로 누이동생의 아들 박동문 집에서 만나 회포를 풀자는 뜻이다.

이 편지가 발각된 것인지 이들은 결국 사헌부에 끌려갔다. 사헌부는 이들이 1년 이상 정을 통해 왔다고 했다.

세종은 “세족(世族)의 집안이며, 지신사는 왕명을 출납하는 중책인데 이런 강상죄(綱常罪)를 범했느냐”며 정해진 법 이상의 중벌을 내렸다. 유씨는 저잣거리에 3일 동안 세워 두었다가 목을 베었다. 조서로는 공신의 아들이라 귀양만 보냈다.

조서로를 그렇게 성심껏 대해 주는 남편을 바라보는 유씨 부인의 심정은 어땠을까? 편치 않았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서로에게 만나자는 편지를 보낼 수밖에 없는 마음은 또 어땠을까? ‘이러다 결국 사달이 나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으리라. 유씨 부인은 자신을 어쩌지 못하고 상황에 빠져들고 있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에게도 사랑은 불가해였던 모양이다. 오늘도 사랑은 계속 다시 정의되고 있다. 그만큼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얘기다. 사실 사랑만큼은 계속 불가해로 남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사랑마저 정복돼 버리면 세상은 얼마나 밋밋하겠는가. 우리에겐 거의 남는 스토리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