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흔적 지닌 도시를 위하여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4호 09면

‘성균건축도시설계원’을 이끌 세 사람이 명륜당 안 기숙사 앞에 모였다. 왼쪽부터 정기용·김영섭·조성룡 교수.

성균관대 들머리 명륜당(明倫堂) 앞뜰에는 벌써 봄처녀가 와 있었다. 기숙사와 도서관을 갖춘 대학 건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명륜당이 봄볕을 맞아 기지개를 켜고 있다. 17일 오후 600여 년 세월의 흔적이 묵직한 그 집 앞에 모인 세 명의 건축가는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성균건축도시설계원’ 출범

국내 최초로 대학에 설치되는 ‘건축도시설계원’의 개원을 하루 앞둔 이날, 큰 임무를 맡은 세 사람은 새 길을 내는 구상에 설레는 마음을 열어 보였다. ‘성균건축도시설계원(Sung Kyun Architecture institute·이하 SKAi)’의 원장인 조성룡(64) 성균관대 건축학과 석좌교수, 정기용(63) 석좌교수, 김영섭(58) 교수는 한목소리로 “지속가능한 한국 건축의 미래를 여는 발신 기지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SKAi’는 한마디로 건축과 도시와 인문학을 횡단하는 산학 협동의 연구소입니다. 지금 한국 건축은 지난 세기 후반의 압축성장과 건설 위주로 내달리던 환경 속에서 큰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피폐해진 현실 속에서 집을 짓는 사람이나 그 안에서 사는 사람이나 모두 방향을 잃고 힘들어합니다.

‘SKAi’는 이런 시대 요청 속에 태어났습니다. 공공성과 공동성을 추구하면서 사회가 원하는 올바른 건축가상을 일굽니다. 건축과 도시 공간설계의 수준을 높이며 국제적 수준의 설계와 기술 개발을 도모하면서 지속가능한 건축과 도시 공간의 창출에 기여하려고 합니다.”

조성룡 원장은 ‘횡단’이란 단어에 힘을 줬다. 성균관대 디자인대학원과 연계해 여러 분야의 전문성을 두루 나누고 현장과 연결하는 힘을 모으겠다는 것이다. ‘SKAi’는 건축도시디자인학과 안에 ‘건축도시디자인 전공’과 ‘공공건축 거버넌스 전공’을 둬 한국 사회에 적절한 도시와 건축을 만들어 갈 인력을 키운다.

의과대를 품은 종합병원이 이론과 현장을 연결하는 것처럼 연구원과 설계실이 주고받는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 전략이다. 특히 올 2학기나 내년 1학기에 개설할 ‘공공건축 거버넌스 전공’은 현장을 책임지고 있는 행정가를 위한 재교육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정기용 교수는 “건축 일을 하면서 건축 관련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공무원들이 일하며 느끼는 전문 지식에 대한 목마름이 하늘 같다는 걸 알게 됐다”며 “이들과의 소통이 한국 건축 발전에 핵심 동력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건축인과 건축 분야 공무원들은 서로 일하는 과정을 몰라 일어나는 적대시 또는 유착으로 그동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제대로 된 교류가 없으니 양쪽 다 답답할밖에요. ‘SKAi’는 건축과 도시를 바라보는 이해의 폭을 넓히고 그런 시각을 현장 실무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횡단과 소통, 협력의 장이 될 것입니다. 현직 인력의 재교육은 물론이고 전공자가 현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도 뚫을 겁니다.”

‘SKAi’가 그리는 또 하나의 큰 그림은 성균관대가 이어온 유교 철학과 관련 있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건학 이념, 인의예지(仁義禮智)의 교시를 현대 한국 건축으로 재해석해 세계로 내보내겠다는 꿈이다. 정기용 교수는 “서구 문물과 이론을 수입해 거기에 우리 땅과 몸을 꿰맞춰 온 과거에서 벗어나 한국 건축 철학을 일구자는 미래의 희망”이라고 설명했다.

두 선배의 말을 듣고 있던 김영섭 교수가 기자에게 따끔한 쓴소리를 털어놨다. “신문에서 ‘부동산 특집’이란 말 좀 하지 마세요. ‘때려 부술 저 집을 사라’ 외치는 언론 탓에 한국의 도시들은 기억이 없는 투기장이 돼 버렸어요.

되팔아서 더 비싼, 아니 더 비싸게 팔 수 있는 집을 짓는 일을 건축이라고 오해하는 우리 생각이 바뀌어야 한국 도시가 시간의 흔적을 지닌 지속가능한 삶터가 될 겁니다. ‘SKAi’가 그 일에 앞장설 테니 두루 알려서 함께 힘을 보태게 해 주세요.” 사진 신인섭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