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양의 그윽한 내음, 실론 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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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호 34면

1 고산지대 경사면을 따라 끝없이 펼쳐진 차 농원의 정경

귀가 약간 먹먹하다 싶었는데, 눈앞에 푸른 베일이 펼쳐졌다. 둥글둥글한 산꼭대기에서 흘러내린 차(茶)의 베일.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달려도 달려도 끝간 데 없이 푸르다. 인도 남부의 섬나라 스리랑카가 자랑하는 차 밭이다. 해발 2000m의 고원 도시 누와라엘리야(Nuwara Eliya)는 그렇게 신록의 빛깔로 다가왔다.

18세기 영국의 여류 소설가 제인 오스틴은 상류 사회의 여유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종종 홍차 마시는 풍경을 묘사했다. 그의 소설과 삶에 드러난 차 문화를 연구한 책(『오만과 편견의 제인 오스틴, 그와 차를 마시다』 킴 윌슨 지음, 이룸 펴냄)이 있을 정도다.

오스틴은 집안에서 차 당번이었다. 차를 넣어둔 함은 자물쇠로 잠가두고 열쇠를 들고 다녔다고 한다. 워낙 귀했기에 다른 음식은 하인을 시켜도 차 끓이기는 주인 몫이었다는 것이다.

홍차가 귀한 것은 영국에서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 플랜테이션은 영국이 식민지 경영에서 중요하게 여겼던 것 중 하나다. 커피 생산의 강국이던 스리랑카도 영국 통치기인 18세기 후반부터 차 재배로 돌아섰다.

2, 3 고산지대 누와라엘리야의 차 밭에서 스리랑카 여인이 찻잎을 따고 있다 4 잘 우러난 홍차는 맑은 오렌지빛을 띤다

현재 스리랑카 전체 차 밭은 24만㏊로 여기서 매년 3억㎏이 생산된다. 이 중 10%만 국내 몫이고 나머지는 해외로 수출된다.산 위에서 바쁘게 찻잎을 따던 여인들이 카메라를 보고 잠시 손길을 멈췄다. 면 수건을 이마에 두르고 등에 커다란 대바구니를 짊어진 모습이다.

바구니엔 생엽 4~5㎏를 담을 수 있는데, 하루 8시간 일하면 15~20㎏을 딴다고 한다. 일당은 200~300루피(약 2000~3000원)다. 땡볕 아래 고된 노동을 생각하면 턱없이 적은 임금이지만 가난한 스리랑카에선 이마저 귀한 일자리다.

차는 나무가 아니라 덤불(bush)이다. 키가 1m 남짓한 차 덤불은 수명이 40년 정도라고 한다. 알싸할 정도로 푸른 잎내가 코끝을 찌른다. 한 번 뜯은 찻잎은 7일 만에 다시 돋는다. 매주 다시 뜯는단 얘기다. 바구니에 담긴 찻잎은 가공 공장으로 향한다. 누와라엘리야의 오래된 홍차 제조업체 ‘블루 필드 티(Blue Field Tea)’를 찾아 천연의 가공 과정을 둘러봤다.

먼저 위조(萎凋·withering). 어둑한 실내에서 2t짜리 탱크 여럿에 쌓아둔 생엽은 12시간 정도 덖으면 수분이 50% 제거된다. 탱크당 무게가 1t으로 줄어드는 셈이다. 이것을 롤링 머신(rolling machine)으로 21분간 빻으면 미세한 부스러기로 화한다.

이른바 유념(柔捻·rolling) 과정이다. 빻은 찻잎을 채로 거르는데, 먼저 걸러진 미세한 잎들은 고품질로 분류되고, 채에 남은 것들은 한 번 더 걸러 낮은 등급의 ‘더스트(Dust)’로 보내진다.

다음은 발효(醱酵·oxidization). 널찍한 플라스틱 상자에 2시간30분쯤 담아둔 찻잎은 갈색으로 변한다. 블랙 티(black tea)라는 이름이 붙게 되는 이유다. 산화된 찻잎은 특유의 향기, 즉 아로마를 띠게 된다.

마지막이 건조(乾燥·drying)인데, 건조 기계(dryer machine)는 목재로만 가열한다. 섭씨 110도에서 21분간 가열하면 수분이 다시 47% 감소된다. 결국 처음과 비교해 찻잎의 수분은 3%만 남는 셈이다. 바싹 마른 찻잎을 기계에 넣어 줄기(stem)와 잎(leaves)을 분리해낸다.

누와라엘리야는 우바·딤불라와 더불어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차 산지다. 세계적인 홍차 브랜드 립턴(Lipton)은 누와라엘리야의 차를 주성분으로 사용한다. 차 포장지를 자세히 보면 OP·BOP·BOPF 등의 표시를 볼 수 있다.

OP(Orange Pekoe)는 가장 엷고 가벼운 맛을 내 초보자에게 적당하다. BOP는 가장 대중적이며 우유 없이 그냥 마시는데, 보통 영국식 아침(English Breakfast)에 곁들이는 홍차도 이것이다. BOPF는 더 작은 입자로 이뤄져 있으며 맛이 강해 우유와 마시면 적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Dust No.1은 두 번 간 찻잎으로 현지에서 주로 소비된다.

최상품은 골든팁(golden tips)과 실버팁(silver tips)이다. 둘 다 가지 끝의 황금빛 어린 잎만 골라 따는데, 골든팁은 14일간 말린 것이고 실버팁은 8~9일 말려 생산한다. 생엽 30㎏를 가공해 나오는 게 불과 1㎏다. 일반 BOP 등이 5㎏에서 1㎏를 생산하는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귀한지 알 수 있다. 산지에서 골든팁은 100g에 30달러, 실버팁은 28달러 정도에 살 수 있다.

유백색 찻잔에 홍차를 따른다. 인도양의 노을 빛깔이 말갛게 퍼진다. 떫은 듯 은은한 향기가 입 안 가득 밀려든다. 1972년 원래 국명을 회복한 ‘스리랑카’는 이 홍차의 풍미와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차를 마실 땐 실론(Ceylon)이란 옛 이름으로 불러야 할 것 같다. 실론 차를 맛나게 즐기는 법에 관해선 김영사의 ‘잘 먹고 잘 사는 법’ 시리즈 52 『홍차』, 혹은 갤리온 출판사의 『나는 티타임에 탐닉한다』(이민숙 지음)를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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