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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연의패션리포트] ‘패션 피플’ 옷차림이 그 사람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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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에 자주 등장하는 새로운 용어 중 ‘패션 피플’이 있다. 요란한 의상을 차려입고 패션쇼장의 앞줄을 차지하며 스타들을 친구로 두기도 하는 화려한 ‘별종들’일까? 혹은 지독히도 옷을 좋아하는 ‘패션 빅팀(fashion victim)’들인가? 미디어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신인류’인가? 패션 피플이라는 이 흥미로운 이들은 누구인가.

상황은 꽤 달라졌다. 우리 사회에는 ‘판~타지’와 ‘엘레강~스’만 있는 줄로 알던 패션계가 어느덧 산업으로 성장했다. 디자이너와 모델 외에 패션 에디터와 스타일리스트, 패션 PR, 바이어, 헤어 스타일리스트, 메이크업 아티스트, 패션 포토그래퍼, 각종 에이전트 등 다양한 패션 관련 직업도 늘어났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에도 ‘패션 피플’들이라는 집단이, 어슴푸레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패션이라는 ‘업’이 가지는 독특한 속성 때문에 패션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람은 옷으로 판단하지요

“저희(그들만의 패션 피플)끼리는 만나면 일단 웃옷 라벨부터 확인해요. 그게 ‘잘 지냈어?’하는 인사보다 먼저죠.” 언젠가 사석에서 한 디자이너가 친하게 지내는 형들이나 동생들(그들의 직업은 대부분 청담동의 레스토랑 경영자이거나, 멀티숍 바이어, 혹은 모델이나 DJ)을 만날 때 버릇처럼 하게 되는 독특한 ‘의식’에 대해 털어놓았다. 농담처럼 한 얘기지만 실제로 패션계에서 취향은 물론 자신이 갖고 있는 재능까지도 표현해 주는 가장 큰 수단은 옷 차림새다. 갓 졸업한 패션 디자이너 지망생들이 취업 인터뷰에서 받는 질문은 패션 마케팅이나 디자인 영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어떤 브랜드의 옷을 즐겨 입는가, 지금 입은 옷은 어디 제품인가 등에 관련된 게 더 많다. ‘겉모양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교과서적인 도덕관이 통하기 힘든 곳이 바로 패션계다. 패션 피플들은 직업적인 능력 외에 겉모양도 가꿀 줄 아는 기술을 터득해야만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패션 피플은 곧 패션 빅팀?

패션은 소비 문화의 전령이다. 시즌이 바뀌면 다시 새 것을 보여주고 유혹하고 사게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탐욕스러운’ 업의 속성 때문이 아닐지라도 패션계 종사자들은 자연스레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최신 유행을 접하고 신상품들을 제일 먼저 만나기도 한다. 언론이나 VIP를 대상으로 하는 각종 브랜드의 샘플이나 프레스 세일, 혹은 잦은 해외 출장을 이용한 막간의 쇼핑을 즐기다 보면 패션 피플들의 소비는 그칠 날이 없다. 그들의 신발장과 옷장은 해가 갈수록 불어난다. 보통의 샐러리맨들은 직장 생활 10년이면 전셋집이라도 마련한다는데, ‘패션계 10년’이면 철 지난 옷만 고스란히 껴안게 된다는 얘기가 돌 정도다.

미워도 ‘비주’ 한번

국내외를 막론하고 패션 피플 중에는 ‘대가 센’ 사람이 많다. ‘반화류계’라는 자조 섞인 농담이 있을 정도로 패션계는 겉으로는 화려하나 속으로는 눈물겨운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대가 세거나 강한 성격의 소유자만이 살아남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끼리 대인관계를 원만히 하기란 또 좀처럼 쉽지 않다. 그런데도 패션 피플들은 누굴 만나든지 잊었던 친구를 만난 듯 반갑게 인사한다(때론 서양식으로 포옹과 ‘비주(키스)’까지도 곁들여서). 그래서 패션 피플들의 공식적인 얼굴과 표정은 그리 믿을 만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혹 어떤 패션 피플이 십 년 만에 만난 죽마고우처럼 당신을 대했다 하더라도 너무 큰 기대나 실망은 말라. 의례적인 호들갑일 가능성이 더 클 수 있으니까.

연예인은 내 친구

패션 피플들과 몇 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의 대화 속에 등장하는 ‘나영이’ ‘빈이’ ‘지섭이’ 는 동네 친구가 아닌 유명 연예인임을 알게 될 것이다. 스타들에게 레드 카펫 룩을 골라 주고, 매일 아침 머리와 메이크업을 해 주고, CF 촬영 때 숱한 스태프 속에서 보모처럼 그들을 보호해주기도 하는 것이 패션 피플들의 일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정말 스타들이 ‘동네 친구’ 같은 존재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보통 사람들에게는 놀랍고도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가끔 그들에게 이렇게 묻기도 한다. “정말 아무개랑 아무개랑 연애 중이야? 함께 여행도 갔다 왔다면서….” 그들은 아는 듯 모르는 듯한 묘한 표정으로, “잘 몰라요…사생활인데…” 라며 또 한번 그들의 ‘친구들’을 보호한다. 이래서 그들이 스타들의 성을 떼고 이름만 부를 자격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변신의 귀재, 카멜레온

패션 피플 중에는 유난히 ‘멀티 플레이어’가 많다. 홍보 회사를 차렸는가 하면 모델 에이전트 역할도 하고 있고, 패션 바이어를 하면서 인테리어 디자인을 겸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포토그래퍼로 일을 하다가 액세서리 디자인을 하기도 한다. 연예인으로 활동하다가 패션 칼럼니스트, 홍보 대행사, 프로덕션 회사의 대표 등으로 변신하며 패션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오제형(프레싱크 대표)씨는 스스로를 ‘멀티 플레이어’라고 소개하는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다. “패션이란 것이 워낙 복합적인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자연스럽지요. 저의 경우는 한 가지 일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즐거워요.” 오제형씨의 설명처럼 유독 다재다능하고 창조적인 인재들을 필요로 하는 업계의 속성상 당연할 수도 있겠다. 현대의 중요한 문화적 코드 중 하나가 ‘크로스오버’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또 하나의 트렌드 아닐까.

진정 패션을 사랑하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치명적 오류는 패션 피플들의 ‘열정’을 무시했다는 점이다. ‘Passion for Fashion’. 이것이 없으면 그들은 곧 죽음이다. 지위가 높고 낮고,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서 패션 피플들이라면 패션이 주는 꿈과 위트와 긴장감과 설렘과 미학을 죽도록 사랑한다. 해가 바뀌고 시즌이 달라져도 패션 피플들은 디자이너들이 새롭게 만들어낸 유행과 옷과 스타일에 감동받고 흥분한다. ‘이번 시즌 아무개 컬렉션은 정말이지, 상상 이상이야!’, ‘아무개 브랜드가 아티스트 아무개랑 콜라보레이션한 작품 봤어요? 대단하지 않아요?’ 그들은 이번 시즌에도, 다음 시즌에도 이런 대화를 나눌 것이 분명하다.

강주연 패션잡지 엘르(ELLE) 부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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